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브루투스, 너마저"… 권력과 배신의 드라마 그렸죠
입력 : 2025.06.09 03:30
줄리어스 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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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킬링 시저'의 한 장면. 죽은 시저를 친구 안토니우스가 품에 안고 애도하고 있어요. /토브씨어터컴퍼니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겁니다. 고대 로마의 정치인이자 장군이었던 줄리어스 시저가 자신이 아끼던 동료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기 직전 남긴 말로 알려져 있죠. 그러나 실제로 시저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을까요?
약 2000년 전인 고대 로마 시대로부터 전해지는 사료에는 이런 기록이 없습니다. 문헌들에 따르면, 시저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있었다고 해요. 그럼에도 이 말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 덕분입니다. 셰익스피어는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대사를 넣었는데, 이 한 구절 때문에 마치 실제로 시저가 이 말을 한 것처럼 알려진 것이지요.
이 대사는 극적 효과를 위해 셰익스피어가 상상력을 발휘해 덧붙인 대사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이에게 '가까운 사람의 배신'을 표현할 때 사용되고 있지요. 바로 이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연극 '킬링 시저'(7월 20일까지·서강대 메리홀 대극장)가 최근 공연되고 있는데요. 오늘은 이 연극을 통해 고대 로마 사회와 줄리어스 시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로브 극장에서 첫 공연
셰익스피어는 52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희곡 38편과 소네트(정형시) 154편, 서사시 2편을 남기는 등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어요. '줄리어스 시저'는 그가 35세였던 1599년 영국 런던의 '글로브 극장'에서 초연된 작품이에요. 이곳은 셰익스피어가 주주로 참여하면서 주요 작품들을 올렸던 극장으로도 유명합니다. '줄리어스 시저'는 이 극장의 개관작으로도 알려져 있지요.
작품의 제목은 로마의 영웅 '줄리어스 시저'이지만 사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시저를 암살한 브루투스입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일어난 시저의 암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시저와 브루투스라는 두 인물과 함께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로마 정치사를 함께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로마의 권력을 장악하다
줄리어스 시저의 가장 큰 업적은 단연 '갈리아 전쟁(기원전 58~51)'입니다. 갈리아는 오늘날 프랑스와 북이탈리아에 걸쳐 있었던 광대한 땅으로, 다양한 부족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시저는 수년간 전쟁을 벌여 이들을 제압하고 갈리아 전역을 로마의 속주로 편입시켰습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로마 문화와 행정 체계가 유럽 대륙 곳곳으로 확산됐고, 라틴어와 로마법, 도시 조직 등이 전파되며 프랑스 문화의 토대가 됐죠.
그런데 로마의 '원로원'은 시저의 승리가 마냥 기쁘지는 않았어요. 원로원은 고대 로마에서 나라의 중요한 결정을 하던 귀족 회의였습니다. 하지만 시저처럼 힘이 센 장군들이 등장하면서 점점 힘을 잃게 됐지요. 급속히 커진 시저의 영향력을 경계한 원로원은 시저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게 됩니다. 특히 과거 시저와 함께 '1차 삼두정치'를 구성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점차 원로원파로 전향해 시저와의 전면전에 나서게 되죠. 1차 삼두정치는 시저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인물이 권력을 분점하던 비공식 정치 동맹이었습니다.
그 무렵 로마 공화정의 형식적 틀은 유지됐지만, 900명에 달하는 원로원은 실질적인 권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시저는 원로원의 명령을 거부하고 로마의 권력을 장악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넘어 로마로 진격하던 그 순간, 역사에 길이 남을 이 유명한 말을 남기죠. "주사위는 던져졌다."
시저와 브루투스의 내면 조명
연극은 기원전 45년 줄리어스 시저가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을 마무리하고 개선장군으로 로마에 귀환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후 그는 로마의 권력을 잡고 사실상 공화정 체제를 종식시키지요. 이때, 시저의 오랜 동료였던 브루투스는 시저를 암살하기로 결심합니다.
브루투스는 실제로시저 암살에 가담한 핵심 인물이지만,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속 브루투스는 역사적 사실과 극적 허구가 교차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공화정 수호를 꿈꾸는 이상주의자였지만 자신의 동료를 죽여야 하는 비극적 선택 앞에서 고뇌하지요. 연극은 이런 내적 갈등을 겪는 브루투스라는 인물을 조명하지요.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가 초연된 1599년,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통치 말기에 접어든 불안한 시기였습니다. 그는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왕정의 향방 또한 불확실한 상황이었어요. 이런 당시 영국의 상황은 시저가 암살된 이후 혼란과 내전에 빠진 로마와 매우 유사했고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작품에 영국 사회의 긴장을 투영했습니다. 시저의 전제주의와 브루투스가 추구하는 공화주의는 엘리자베스 시대 이후 영국 왕당파와 의회파의 대립과도 닮아 있었습니다.
연극 '킬링 시저'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면서 강력한 인물 간의 대립 구도가 긴박감 있게 이어지는 작품입니다. 7명의 앙상블 배우(합창과 군무를 담당하는 배우)들은 시저의 업적을 칭송하다가 그의 암살에 환호하는 변덕스러운 로마 시민들을 연기합니다. 연극 무대 위에는 반원형 구조의 세트가 있는데요. 이는 로마 공화정이 지향했던 '평등과 견제의 정치'를 상징하지요. 그 위로 기울어진 샹들리에는 곧 닥칠 시저의 비극적 죽음을 암시하며 불안감을 연출합니다.
브루투스는 "시저보다 로마를 더 사랑했다"라고 외치며 암살을 정당화하지요. 브루투스가 꿈꿨던 공화정의 이상은 과연 이루어졌을까요? 안타깝게도 그 이후 로마는 더 깊은 혼란으로 빠져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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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킬링 시저'에서 브루투스는 시저를 죽인 뒤 고뇌에 빠집니다. 기울어진 샹들리에는 시저의 비극적 죽음을 상징하며 불안감을 연출하는 장치예요. /토브씨어터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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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세기 초 그려진 '줄리어스 시저의 죽음'. 붉은 망토를 두른 채 쓰러지고 있는 인물이 시저예요. 시저는 브루투스와 공화정파 의원들에 의해 죽음을 맞습니다.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