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임금이 타던 말… 태조 이성계는 여덟 마리 준마가 있었죠

입력 : 2020.05.12 03:09

[어승마(御乘馬)]

'팔준마' 중 가장 아꼈던 '유린청'
화살 세 대 맞고도 31살까지 살아… 돌로 만든 관으로 특별 장례 치러
연산군은 빠르고 난폭하게 말 몰다 의정부서 "천천히 몰라" 아뢰기도
선조는 왜란 중 말 기르다 항의받아

최근 한 TV드라마에서 가상의 대한제국 황제가 타고 다니는 백마 '맥시무스'가 인기를 끌고 있어요. 말은 우리 전(前)근대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역대 통치자들은 전쟁의 승패와 나라의 강약(强弱)이 말에 달렸다고 여겼습니다. 특히 조선 시대 왕들의 '말 사랑'은 상당한 수준이었어요.

'임금님의 말'은 제주도 백마

조선 시대 임금이 타던 말은 어승마(御乘馬)나 어마(御馬)라고 했습니다. 왕의 말과 수레를 관리하기 위한 '내사복시'란 관청을 따로 둘 정도로 특별히 신경을 써서 어승마를 10필 정도 준비했다고 하네요. 지금도 말 목장으로 유명한 제주도에서 혈통 좋은 어승마를 많이 키웠다고 합니다. 어승마로는 권위와 위엄을 높이는 신성한 존재로 인식되던 백마를 선호했다고 해요. 드라마의 설정에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셈입니다.

장차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할 때도 말타기는 중요 과목 중 하나였습니다. 세자 교육은 전통적 유교 교육인 육예(六藝)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 전인교육이었는데요, 육예란 예절[禮], 음악[樂], 활쏘기[射], 말타기[御], 글쓰기[書], 수학[數]이었습니다.

돌로 만든 관에 장사 지낸 유린청

'사방의 오랑캐를 제압해 나라가 편안하니/ 31년 내내 그 신령한 기운이 빛나도다/ 죽어서도 돌로 만든 관 속에서 웅대한 이름을 전하니/ 유린청의 덕을 어찌 칭송하지 않겠는가!' 조선 6대 왕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인 사육신 중 한 명이었던 성삼문이 쓴 시인데, 이렇게 극찬받았던 '유린청'은 사실은 말의 이름이었습니다.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김영석

유린청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타고 다니던 여덟 마리 명마인 '팔준마(八駿馬)' 중 하나였어요. 홍건적과 전투 중 화살을 세 대나 맞고도 죽지 않고 31살까지 살았답니다. 태조는 가장 아끼던 말인 유린청의 죽음을 애통해한 나머지 돌로 만든 관에 시신을 장사 지낼 정도였습니다. 팔준마 중에서는 이 밖에도 1380년 황산대첩 때 왜구 장수 아기발도를 죽일 때 탔던 '사자황', 1388년 위화도 회군 때 탔다는 '응상백'이 유명합니다.

'폭주족' 연산군, '말 사랑' 선조

'말 사랑'이 다소 지나쳤던 왕들도 없지 않았어요. 폭군으로 알려진 10대 임금 연산군은 말도 난폭하게 몰았던 모양입니다. '연산군일기' 1499년 3월 9일 자에 보면 임금이 어승마를 타고 너무 빨리 달린 나머지 좌우 시종들이 아무리 따라가도 쫓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해요. 의정부에서는 "청컨대 종용히 하십시오"라고 아뢰기도 했습니다. '살살 좀 모세요'란 의미죠. 하지만 연산군은 "이 말은 내게 편안하거늘 어찌 아랫사람의 폐를 봐서 불편을 좇겠느냐"고 일축합니다.

그에 비하면 14대 임금 선조는 훨씬 '양심적'이었던 것 같아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11월 16일, 사간 벼슬의 최관이란 신하가 "왜 전란 중에 궁중에서 말을 애완동물처럼 기르는 것이냐"며 겁도 없이 임금에게 항의합니다. 임금은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아니, 마침 암말이 있어 안에다 기르도록 명했을 뿐인데…." 신하가 이 정도로 군주를 꾸짖을 수 있었던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는데, 임금의 애마(愛馬)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죠.

[말고기 말린 별미 음식 '건마육'… 제주 목사가 뇌물로 바쳤대요]

조금 다른 방향의 '말 사랑'도 있었습니다. '세종실록' 1447년 윤4월 14일의 기록을 보면 세종대왕은 "제주 목사가 백성은 돌보지 않고 뇌물 바치기만 잘한다"며 벌을 주려 합니다. 그 뇌물이란 말고기를 말린 '건마육'이었는데, 당시엔 말을 식용으로 쓰는 것을 막기 위해 도축을 금지한 상황이었어요.

뇌물을 받은 사람들은 놀랍게도 조선 최고의 명재상으로 일컬어지는 영의정 황희, 4군과 6진 개척으로 유명한 우찬성 김종서, 훗날 영의정으로 단종을 보좌한 좌찬성 황보인 등이었어요. 평소 부정부패와 거리가 먼 이 신하들이 말고기 앞에선 잠시 흔들렸던 것이죠. 이들을 모두 벌 준다면 국정이 마비될 상황이었기에 세종은 엄중한 경고에 그칩니다. 그만큼 옛날 말고기 맛은 세상이 다 아는 별미였던 모양입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