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문화대혁명 광기에 휩쓸렸던 '마오쩌둥의 아이들'

입력 : 2020.02.26 03:00

[홍위병]
1966~1976년 벌어진 '사회 개조 운동'… 학생 1000만명이 마오쩌둥에 호응
붉은 완장 차고 무리 지어다니며 개혁 주장한 사람들 끌고나와 박해
마오쩌둥, 상황 극단적으로 치닫자 홍위병들 지방 농장으로 보내 수습

지난해 12월 중국에서 발생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붉은 완장을 찬 방역 요원들이 중국 국민을 감시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중 일부가 방역 작업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동영상 등을 통해 퍼지면서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의 홍위병을 연상케 한다는 지적이 있었어요.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요, 홍위병은 누구이고 문화대혁명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대약진운동 실패로 개혁파 득세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 마오쩌둥은 1958년 '대약진운동'이라는 경제성장 계획을 야심 차게 시작합니다. 농촌마다 대규모 집단농장인 '인민공사'를 만들어 생산과 소유의 공동화를 꾀하고, 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기업을 국유화했어요. 그러나 이 과정에서 농촌 노동력이 도시로 빠져나가고, 공동 생산과 배급제의 여파로 생산력이 떨어지게 됐죠. 여기에 흉작까지 겹치며 3000만명 이상이 굶어 죽는 참사가 일어나요. 이를 계기로 마오쩌둥은 1959년 국가주석 자리를 내려놓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주도권을 쥐게 되지요.

1966년 중국 베이징에서 홍위병들이 붉은색 표지의 '마오쩌둥 어록'을 읽고 있어요
1966년 중국 베이징에서 홍위병들이 붉은색 표지의 '마오쩌둥 어록'을 읽고 있어요. 홍위병은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고등학교와 대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그 숫자가 1000만명을 넘었습니다. 이들은 옛 사상과 문화를 파괴해야 할 낡은 관습으로 여겼고, 붉은 완장을 차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교사와 지식인들을 숙청하고 문화유산을 파괴했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개혁파는 자본주의 경제를 일부 도입해 급진적 사회주의에서 일부 후퇴합니다. 개인의 토지 소유와 농산물 판매를 인정해주면서 농민들의 의욕과 생산력이 점차 올라가게 됐지요. 개혁이 호평받자 마오쩌둥은 권력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해요.

문화대혁명의 1000만 행동 대원

1966년 마오쩌둥은 국가와 사회의 구조, 개개인의 정신을 개조하는 새로운 작업을 고안합니다. 이를 위해 '옛 사상, 옛 문화, 옛 풍속, 옛 관습'을 자본주의와 봉건주의의 유물로 규정하고 '4구(舊) 타파운동'을 시작하지요. 이것이 바로 문화대혁명의 시작입니다.

낡은 것들을 몰아내고, 기존 체제의 권위에 대항하라는 메시지는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에게서 큰 호응을 얻게 됩니다. 칭화대와 베이징대 등 대학을 중심으로 개혁파에 맞서고 마오쩌둥을 떠받들기 위해 '홍색 정권을 보위하는 병사'라는 뜻의 '홍위병(紅衛兵)' 조직이 결성됩니다. 이들은 마오쩌둥과 함께 8차례에 걸쳐 대규모 집회를 열고 점차 전국적으로 학교에 혁명 조직이 결성되지요. 홍위병에 가담한 학생 수는 무려 1000만명이 넘습니다.

홍위병은 붉은 완장을 차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각 지역 당 지도자들과 교사, 지식인들을 길거리에 끌고 나와 마구 돌팔매질을 하거나 몽둥이로 때렸어요. 최고 권력자였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도 예외는 아니어서 모진 고초를 겪고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지요. 그뿐만 아니라 홍위병은 유명한 식당도 자본주의적이라면서 부수거나 죽과 만터우(중국식 찐빵)만 팔도록 하고, 혁명을 상징하는 빨간색이 신호등에선 정지신호로 쓰이는 것이 말이 안 된다며 이를 전진 신호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어요. 아직 정치적 의식이 성숙하지 못한 홍위병의 행태는 점차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

홍위병으로 인한 피해가 갈수록 커지자, 기존 당 지도부는 적위대를 내세워 이들에게 맞섰고 각 지역 농민들도 홍위병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이 때문에 문화대혁명은 점차 내란으로 번지게 됩니다. 다시 권력을 잡게 된 마오쩌둥은 1968년 홍위병에 가담했던 청년들을 지방 농장으로 내려 보내는 하향운동을 실시해 사태를 수습합니다. 이후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문화대혁명 역시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죠.

'현대판 분서갱유'로 이어져

10년 동안 이어진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문화적 피해도 극심했습니다. 건물·서적 등 역사 유산들도 홍위병에겐 파괴해야 할 구시대적 산물이었기 때문이죠. 중국에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공자의 묘가 파헤쳐지고 수많은 유교 경전이 소실되었어요. 10년간 이어진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전체 손실액이 1949년 중국 건국 뒤 30년 동안 사용한 사회 기반 시설 투자액의 80%에 달하는 5000억위안에 달한다는 추계도 있습니다. 일부 중국 역사가는 문화대혁명을 기원전 3세기 진나라 시황제가 사상 통제를 위해 농서 등을 제외한 각종 서적을 불태우고 유생 수백명을 생매장한 '분서갱유'에 빗대 '현대판 분서갱유'라고 묘사합니다.

일부 문화재는 극적으로 피해를 면하기도 했습니다. 17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항저우의 사찰 영은사(靈隱寺)는 저장대학 학생들의 보호를 받아 큰 피해를 피할 수 있었어요. 당시 문화대혁명에서 온건한 입장이었던 저우언라이 총리는 자신의 능력 안에서 문화재를 지키려 노력했어요. 600여년간 명나라와 청나라의 황제 궁전이었던 자금성은 저우언라이가 배치한 군대 덕에 완전한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