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18세기 임윤지당, 남성만이 학문을 논하던 시대에 도전장

입력 : 2019.10.22 03:00

[조선의 여성 성리학자]
시집가서도 밤에 몰래 성리학 연구… 당대 화두였던 '이기론' 새롭게 해석
"남녀는 동등하며 상호보완적 존재" 다른 여학자 강정일당에게도 영향

이름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당'은 여성임을 구별하려고 사람들이 붙여

경기 고양 국립여성사전시관에서 지난 1일부터 '세상으로 나가다―여성 직업 변천사 100년' 전시가 열리고 있어요. 근대 서양식 교육을 받은 한국 첫 여의사 박에스더, 1924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 등 각 분야에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과 관련한 전시물을 만나볼 수 있어요. 그런데 조선 시대에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성리학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며 남녀평등을 주장한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여자도 성현이 될 수 있다'

흔히 한반도에서는 19세기 개화의 물결 속에 남녀가 평등하다는 근대적인 여성관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근대화의 바람이 일기도 전인 1700년대 여성으로서 학문에 온 힘을 기울여 성리학자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 있었어요. 바로 조선 영조·정조 때 인물 임윤지당(1721~1793)입니다.

[뉴스 속의 한국사] 18세기 임윤지당, 남성만이 학문을 논하던 시대에 도전장
/그림=안병현
임윤지당은 함흥판관을 지낸 임적과 호조정랑을 지낸 윤부의 딸인 윤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식과 견문이 뛰어나 여자이면서도 두 오빠와 남동생의 성리학 토론에 참여,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해 주위를 놀라게 했어요. 임윤지당의 둘째 오빠였던 임성주는 여동생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알아보고는 그녀에게 '대학' '논어' '중용' 등 유교 경전을 가르쳐줬어요.

임윤지당은 19세에 시집을 갔어요. 남편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 뒤로 시댁에서 살았는데, 낮에는 살림에 힘쓰고 밤이 깊어서는 소리 내지 않고 책을 읽어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고 해요.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동생 임정주에게 자신이 저술한 글을 넘겼고, 그녀가 숨지고 3년 뒤인 1796년 그녀의 글이 '윤지당유고'라는 책으로 나오면서 후대에 알려집니다.

그녀는 '이기심성설' '인심도심 사단칠정설' '극기복례위인설' 등 성리학에 대한 글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론을 남겼습니다. 특히 당대 성리학의 핵심 주제였던 '이기론'과 관련해 '남자와 여자는 음양의 질서와 같이 상호보완적인 존재'라고 주장했어요. "남녀 모두 하늘로부터 동등한 성품을 받았으므로 여성도 성현이 될 수 있다"고도 했지요. 그는 조선의 최초·최고의 여성 성리학자로 꼽힙니다. 신사임당은 시서화에 능했지만, 성리학자로 꼽히지는 않거든요.

성리학과 서예에 재능을 보인 강정일당

임윤지당보다 50년 뒤에 태어나 정조·순조 때 활동했던 강정일당(1772~1832)도 여성 성리학자입니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남편의 학문을 도왔고, 틈틈이 자기 학문 세계도 구축했어요. 강정일당은 "어려움을 견디며 몸과 마음을 다하여 노력하여 성현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며 여성도 학문의 도를 이룰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강정일당은 생전에 유교 경전 연구를 비롯해 10여 권에 이르는 글을 남겼다는데 이는 전해지지 않아요. 다만 그녀가 죽은 뒤 남편이 아내의 시와 서간문을 모아 펴낸 '정일당유고'는 전해집니다. 이를 통해 그녀가 성리학뿐 아니라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어요.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신사임당과 임윤지당의 재능을 함께 갖췄다"고 칭찬하고 있지요.

신사임당, 임윤지당은 모두 본명이 전해지지 않아요. 이들은 '사임' '윤지'를 호(號·이름 대신 부르는 별명)로 썼는데, 조선 시대 사람들은 이들이 여성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안주인이 기거하는 별채'라는 뜻의 당(堂)을 호 뒤에 붙여 불렀어요.


[한국 최초 여성 인권 선언문]


"우리나라보다 먼저 문명개화를 한 나라들은 여성도 학문과 지식이 남성 못지않아 그 권리도 남녀가 평등하다." 국립여성사전시관이 전시하고 있는 한국 최초의 여성 인권 선언문 '여권통문'에 실린 내용입니다. 1898년 9월 서울 북촌의 양반 여성들이 이소사(李召史), 김소사(金召史)의 이름으로 여학교를 세우자는 글을 발표합니다. 소사(召史)는 평민 아내를 일컫는 호칭이었습니다. 통문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 글을 말하지요. 이후 여성도 직업을 가질 권리,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퍼지게 되죠.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