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짧은 시 형식의 역사책… 왕에게 충언하려 만들었죠

입력 : 2016.05.02 03:33

[이승휴의 '제왕운기']

1280년 고려 학자 이승휴
충렬왕·권문세족 횡포 고발하는 상소문 올렸지만 벼슬서 쫓겨나
임금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 역사 요점 간추린 '제왕운기' 써요

나라가 불안정했던 고려 말엽 이승휴라는 사람이 강원도 삼척 '천은사'라는 절에서 역사책을 쓰고 있었어요.'지금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너무나 불안정하구나. 이런 불안한 시대를 바로잡으려면 무엇보다 정치인과 백성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 중요해.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것이고, 그 뿌리는 당연히 역사에서 찾을 수 있지.'

1287년 완성된 이 역사책은 단군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를 아주 쉬운 시 형식으로 다룬 제왕운기(帝王韻紀·제왕이 알아야 할 운율이 있는 역사 기록)예요. 제왕운기는 처음으로 발해를 우리 역사로 다룬 것으로도 유명하며,'삼국유사' '삼국사기'와 함께 고려 시대에 지어진 중요한 사료로 꼽힌답니다.

나라 걱정 담아 임금께 올린 역사서

제왕운기를 지은 학자 이승휴는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어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윈 그는 열심히 공부를 하여 1252년 문과에 급제한 뒤 고향 삼척에 금의환향했어요. 하지만 1254년부터 6년간 이어진 몽골의 침입으로 관리가 되지 못하고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모셨죠. 1263년에야 이장용·유경 등의 천거를 받아 겨우 벼슬길에 올랐어요.

1273년 이승휴는 문서 기록을 담당하는 서장관으로 원나라(몽골이 세운 나라의 국호)에 파견돼 멋진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어요. 이승휴와 함께 원나라에 갔던 동료인 송송례는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킨다는 말은 임자를 두고 하는 말이오"라고 감탄했다고 하지요. 1274년 원종이 죽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태자(충렬왕)의 상복을 고려식으로 할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았어요. 몽골과 다른 고려만의 문화 독자성을 지킨 것이지요.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이혁

당시 고려에서는 원나라만 떠받들며 따르는 권문세족이 세력을 키워 백성의 삶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자기들 재산을 늘리기에만 급급했어요. 충렬왕은 이들이 저지르는 온갖 못된 짓을 눈감아주며 오히려 그들에게 나랏일을 맡긴 채 사냥과 노는 데에만 빠져 있었어요. 1280년 이승휴는 감찰사의 관원들과 함께 충렬왕이 정치에서 잘못한 일과 측근 인물들의 횡포를 10가지로 조목조목 기록한 상소문을 올렸어요. 충렬왕이 신뢰를 주지 못했던 일, 측근들과 그 밑에 있는 인물들이 저지른 백성에 대한 수탈 등을 충언한 것이었죠. 하지만 되레 이승휴가 벼슬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어요. 그 뒤로 이승휴는 고향 삼척으로 돌아와 임금께 올릴 역사책 '제왕운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랍니다.

이승휴는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마음을 어떻게 하면 전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여러 차례 상소문을 올려보았었지만 효과가 없었구나. 임금님이 내 글을 읽어 스스로 잘못을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읽기 좋은 시 형식으로 역사를 기록한 책을 써서 올려야겠군!' 이승휴는 이런 생각으로 한 구절이 7글자로 된 7언시, 5글자로 된 5언시로 우리 역사의 요점만 간추려 제왕운기를 써나갔어요.

발해 포함해 한민족의 뿌리 역사 다뤄요

제왕운기는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어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요? 상권에서는 당시 세계사에 해당하는 중국의 역사를, 하권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뤄요.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를 나란히 써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중국과 견줄 만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겠지요.

우리나라의 역사는 다시 2부로 나누어 구성돼요. 1부'동국군왕개국연대'는 단군 조선·기자 조선·위만 조선을 포함하는 고조선 시대, 마한·진한·변한을 포함하는 삼한, 우리가 잘 아는 신라·고구려·백제, 통일신라와 발해, 후고구려, 후백제 등 고려 이전의 한국사에 대한 기록이에요. 2부인 '본조군왕세계연대'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부터 이승휴가 모신 충렬왕까지의 역사를 다뤄요.

제왕운기는 철기 시대 옥저·동부여·예맥을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밝혔어요. 부여와 고구려 근처 위치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옥저·동부여·예맥 민족은 현재 역사학계에서 고대 한민족 계통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또 처음으로 발해를 우리 역사로 인정해 고구려를 계승하는 나라로 다뤘고, 고구려 건국신화에 대한 자료도 많이 담고 있어요.

특이한 점은 제왕운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의 내용이 약간 다르다는 것이랍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는 환웅과 웅녀가 결혼해 단군이 태어나는 것으로 기록돼있어요. 그리고 이게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단군신화의 내용이지요.

그런데 제왕운기에서는 환웅의 손녀가 인간이 되는 약을 먹고 신성한 나무의 신인 단수신과 결혼해 단군을 낳아요. 제왕운기는 독특한 역사 서술로 인해 학술적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자료가 부족한 고대사를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사료랍니다.

지호진·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