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저 장수는 다르다" 왜구도 두려워한 이성계의 활 솜씨
입력 : 2026.11.05 03:30
황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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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 남원시의 ‘황산대첩비지’입니다. 이곳은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른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있던 자리입니다. /국가유산포털
고려 말 왜구는 '숙련 무사 집단'
1380년 동아시아 정세는 혼란의 도가니라 할 수 있어요. 몽골 제국이 붕괴한 뒤 중국에선 홍건적이 들끓었고 일부는 고려를 침략하기도 했죠. 일본 역시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였는데, 숱한 도적들이 일어나 바다를 건너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이들을 바로 왜구(倭寇)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당시 왜구의 전투력에 대해 단순한 '도적' 수준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특히 고려와 가까운 규슈 지방이 문제였어요.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던 쇼니 요리히사(少貳賴尙)와 이주한 무사 세력 사이에서 군사적 갈등이 발생했고, 쇼니 휘하의 병력이 군량미와 물자를 얻기 위해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정규군이나 마찬가지인 '숙련 무사 집단'이 바로 왜구의 실체였던 것이죠.
고려 말 왜구는 40여 년에 걸쳐 무려 591회나 침략해 왔습니다. 대개 수십 명에서 수백 명으로 구성된 복수의 집단이 해안에 상륙한 뒤 내륙으로 신속하게 이동하면서 약탈을 끝냈고, 토벌대가 도착하기 전에 철수했습니다. 왜구가 '삼면이 절벽으로 막힌 곳에서 칼과 긴 창을 고슴도치의 털처럼 겨누고 버텼다'는 기록들이 있는데, 당시 일본 남북조 시대 사무라이들의 전술과 똑같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고작 어민과 상인으로 이뤄진 해적 집단도 막지 못할 정도로 고려 조정이 무능했다'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얘깁니다.
진포 해전, 왜구 배 500여 척 격멸
1377년 한 해 불과 몇 달 사이에 왜구는 경상도·전라도와 제주도·강화도를 침략했습니다. 왜구는 심지어 고려의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까지 공격해 임금이 피란 준비를 하기도 했어요. 최영과 이성계가 이를 격퇴했지만, 아직 각지를 침략한 왜구의 세력은 꺾이지 않았죠.
1380년 8월, 지금의 충남 서천과 전북 군산 사이 금강 하구인 진포에 왜구의 배가 무려 500여 척이나 침입했습니다. 왜구 세력이 한곳으로 총집결한 셈이죠. 고려 조정은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 부원수 최무선에게 전함 100척과 함께 왜구를 막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투에 참가한 부원수의 이름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최무선. 바로 3년 전인 1377년 한국사 최초로 화약을 개발한 인물이죠. 최무선의 화포가 불을 뿜자 밧줄로 연결돼 있던 왜구의 배 500여 척은 순식간에 격침됐습니다.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쳐흘렀다고 합니다. 고려인 포로 334명이 구출됐고, 가까스로 육지에 상륙한 왜구들은 내륙으로 도주했습니다. 이 전투를 '진포 해전'이라 합니다. 왜구와 전쟁을 벌인 고려가 커다란 반전을 이룬 전투였죠.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퇴로가 차단돼 도주한 왜구들은 오히려 육지에 있던 왜구와 합세해 내륙에서 살인과 약탈을 벌였습니다. 추풍령을 넘어 상주를 유린한 왜구는 사근내역(현재 경남 함양)에 주둔했고, 고려 관군이 맞섰으나 이 '사근내역 전투'에서 크게 패했습니다.
왜구 세력에 대한 고려의 '최종 승리'
사근내역 전투 직전, 마침내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왜구 토벌의 수장인 '양광·전라·경상 삼도 순찰사'로 임명했습니다. 왜구는 전라도로 방향을 돌린 상태였는데, 남원산성 공격에 왜구가 실패한 상황에서 이성계가 남원에 도착했습니다. 고려군이 수천 명 이상, 왜구가 수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군사가 남원 근처인 황산에서 격돌했습니다. 1380년 9월의 일입니다.
이성계는 군대를 둘로 나눠, 자신은 정산봉 오른쪽의 작은 길로 군사들과 나아가고 나머지 부대는 평탄한 길로 진격하게 했습니다. 왜구가 고려군의 뒤쪽을 공격할 것임을 미리 알아차리고, 접근한 왜구를 맞아 기병전을 벌였습니다. 이성계가 직접 화살 수십 발을 쏘는 격전이 펼쳐졌죠. 그러는 사이 평탄한 길로 갔던 고려군이 나타나 왜구를 협공했습니다.
피해를 입은 왜구는 높고 험준한 지대로 진영을 옮겼습니다. 왜구의 장수 아기발도는 "저 자(이성계)는 지금까지 본 장수들과 다르니 단단히 조심하라"고 하곤 격렬히 저항했죠. 왜구를 공격하던 이성계가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을 정도로 맹렬한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이성계는 "겁이 나는 자는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을 것이다!"라고 외쳤어요. 왜구의 장수 아기발도가 갑옷을 입은 채 흰 말을 타고 공격하자 이성계는 화살을 쏴 아기발도의 투구를 맞혀 벗겨냈습니다. 이 순간 이성계의 측근 이지란도 연이어 화살을 쏴 투구 밖으로 드러난 아기발도의 얼굴을 맞혀 사살했다고 합니다.
고려군이 승세를 타기 시작하자 왜구는 속속 말을 버리고 산속으로 도망갔고, 그들의 울음소리가 '소 1만마리가 우는 소리 같았다'고 합니다. 고려군은 왜구를 포위 섬멸하는 데 성공해 불과 70여 명만이 지리산으로 도주했습니다. 냇물이 왜구들의 피로 6~7일 동안이나 붉어져 떠 마실 수 없었다고 합니다.
1380년 진포와 황산, 두 전투에서의 승리는 총집결한 왜구의 침략군을 궤멸시킴으로써 고려가 크게 반격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구의 세력은 꺾였고, 행여 서양의 바이킹처럼 왜구가 한반도에 자신들의 터전을 만드는 일은 꿈도 꿀 수 없게 됐죠. 이성계의 위상이 '국가적 영웅'으로 올라서서 12년 뒤 조선 왕조를 개국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