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2m 거대 활로… 수적 우세 佛귀족 무찌른 英평민 군대

입력 : 2026.11.04 03:30

아쟁쿠르 전투

얼마 전 미 국방부는 인공지능(AI), 드론, 로봇 등 최첨단 무인 전투 체계의 실전 배치를 획기적으로 당기기 위한 국방 혁신 프로젝트를 발표했어요. 이름은 '프로젝트 아쟁쿠르'입니다. '아쟁쿠르'는 프랑스의 한 마을 이름인데요. '프로젝트 아쟁쿠르'는 중세 백년전쟁 중 있었던 '아쟁쿠르 전투'에서 따온 것이에요. 당시 영국군은 장궁(거대한 목재 활)이라는 신기술을 활용해 수적으로 우세하고 단단한 갑옷을 입은 프랑스의 정예 기병을 물리쳤어요. 아쟁쿠르 전투처럼 미 국방부는 신기술(드론·AI·로봇)을 통해 기존의 무겁고 비싼 무기체계를 압도하는 21세기 국방 혁신을 꾀하고 있어요. 오늘은 아쟁쿠르 전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게요.

100년간 대결한 영국과 프랑스

1337년, 영국과 프랑스는 왕위 계승권과 영토 문제를 두고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전쟁은 전투와 휴전을 반복하며 약 100년간 이어졌기에 '백년전쟁'이라고도 부르지요. 초반 주도권은 영국이 가져갔어요. 특히 1356년 영국은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사로잡았어요. 프랑스는 막대한 몸값을 치르고 왕을 되찾아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유럽 전역을 덮친 흑사병과 민중들의 봉기로 양국 모두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갈 수 없어 한동안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프랑스에서 샤를 6세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실제 통치는 주변 왕족에게 넘어가고 그들 간 세력 다툼이 일어났어요. 거기에 더해 샤를 6세의 정신 질환을 틈타 파벌 싸움까지 벌어지며 나라가 분열됐죠. 영국의 젊고 야심 찬 국왕 헨리 5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415년, 그는 멈춰 있던 백년전쟁의 톱니바퀴를 다시 돌렸어요.

헨리 5세는 궁수 8000명과 중기병 2000명을 이끌고 프랑스 북부에 상륙했어요. 프랑스 북부의 아르플뢰르를 기지로 삼아 이곳에서부터 노르망디 지방을 정복하고 강을 따라 파리를 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르플뢰르를 점령하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한여름 찌는 듯한 더위와 함께 병사들은 늪지대에서 잠을 자야 했고, 질 나쁜 포도주와 사과주, 오염된 물 때문에 전염병이 터졌거든요. 헨리 5세는 이곳을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심각한 군사적 손실을 입었어요. 병력 3분의 1이 전사하거나 질병으로 죽었습니다. 지친 헨리 5세는 영국 영토였던 칼레 항구로 철수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앞을 막아선 것은 약 3만명에 달하는 프랑스 대군이었어요. 또한 프랑스군에는 당대 유럽 최고의 중장갑 기사단과 귀족들이 총집결해 있었죠. 반면 영국군의 주 병력은 갑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평민 출신의 장궁수들이었어요.

❶영국 장궁입니다. ❷영국과 프랑스가 대결한 아쟁쿠르 전투(1415)를 묘사한 15세기 그림입니다. ❸프랑스 북부 아쟁쿠르의 위치입니다. 헨리 5세가 이끈 영국군은 아르플뢰르를 기지로 삼아 파리를 칠 계획이었으나, 전염병과 더위 등으로 손실을 입고 칼레로 철수하다 아쟁쿠르에서 프랑스군과 맞붙었습니다. ❹헨리 5세의 초상화입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 ❶영국 장궁입니다. ❷영국과 프랑스가 대결한 아쟁쿠르 전투(1415)를 묘사한 15세기 그림입니다. ❸프랑스 북부 아쟁쿠르의 위치입니다. 헨리 5세가 이끈 영국군은 아르플뢰르를 기지로 삼아 파리를 칠 계획이었으나, 전염병과 더위 등으로 손실을 입고 칼레로 철수하다 아쟁쿠르에서 프랑스군과 맞붙었습니다. ❹헨리 5세의 초상화입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갑옷도 뚫는 거대한 활

1415년 10월 25일 아침, 프랑스 북부의 아쟁쿠르 숲 사이 나란히 개간된 좁은 들판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었습니다. 전날 밤 내린 장대비로 땅은 성인 남성의 발목이 푹푹 빠지는 깊은 진흙탕으로 변해 있었어요. 헨리 5세는 이 지형과 장궁의 특성을 활용해 프랑스군을 공격했어요. 우선 영국 장궁수들이 든 약 2m 길이의 대형 활은 전투의 판도를 바꿨습니다. 영국 장궁은 사거리가 200m에 달했고 사슬 갑옷을 뚫을 수도 있었어요. 일반 석궁이 분당 1~2발을 쏘는 동안, 숙련된 영국 장궁수는 1분에 10~12발의 화살을 날릴 수 있었죠. 여기에 더해 헨리 5세는 장궁수 앞에 뾰족하게 깎은 약 1.8m 높이의 날카로운 나무 말뚝을 비스듬히 박아 두도록 지시했어요. 프랑스 중장갑 기병대가 돌격해 올 것을 대비해 말들이 말뚝에 걸려 넘어지게 만든 것이었죠.

헨리 5세의 예상대로, 진흙에 발이 묶인 프랑스의 기마대는 속도를 내지 못했고 영국 장궁수가 퍼붓는 화살 세례에 말들이 놀라 날뛰며 대열이 완전히 붕괴됐어요. 프랑스 기병에 뒤이어 돌격하던 보병들마저, 넘어진 기병들과 얽혀 좁은 통로에 갇혀 버렸죠. 무게만 30~40㎏에 달하는 무거운 갑옷을 입은 프랑스 기사들은 진흙탕에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설 수조차 없었어요. 이 틈을 타 영국 장궁수들은 활을 내려놓고 단검과 망치를 든 채, 진흙탕에 쓰러진 프랑스 기사들을 공격했어요. 많은 프랑스군이 진흙탕에 익사하거나 자기 몸 위로 쓰러진 동료들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해 죽었다고 해요. 몇몇 장소에서는 시체가 사람 키보다 높이 쌓이기도 했죠.

관례 깨고 포로들 처형

헨리 5세의 자비 없는 성격을 보여주는 일도 있었어요.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프랑스 후방 부대가 영국군의 수송대를 공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많은 프랑스군 포로를 잡고 있던 헨리 5세는, 포로들이 내부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후방을 공격해 합세할 것을 우려해 모든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중세 기사도 정신에 따르면 귀족의 포로는 몸값을 받고 풀어주는 것이 관례였기에, 영국 기사들은 처형을 거부했어요. 하지만 헨리 5세는 평민 궁수 200여 명을 시켜 포로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렇게 4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영국군은 모든 예상을 깨고 자신들보다 몇 배나 많은 프랑스 군대를 무찔렀습니다. 프랑스군은 약 1만명의 병사를 잃은 반면, 영국은 몇백 명 정도 인명 손실이 있었습니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는 백작, 남작, 기사 등 무려 4000여 명의 귀족과 지휘관을 잃었습니다.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평민 출신 장궁수였고요. 이 전투는 말 위에 오른 귀족 기사가 전쟁의 주역이던 시대가 끝났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잘 훈련된 평민 집단이 비싼 갑옷으로 무장한 엘리트 기사를 압도할 수 있음을 증명했죠. 아울러 백년전쟁은 사회의 구조를 크게 바꾸었습니다. 전쟁에서 귀족들이 대거 전사하면서 지방 봉건 영주들의 힘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됐거든요. 백년전쟁은 근대 중앙집권 국가가 출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답니다.

그런데 미국은 왜 영국과 프랑스의 전투를 국방 프로젝트의 이름에 붙였을까요? 이는 기존 방식에 안주하지 않고, 신기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혁신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비싼 갑옷으로 무장한 프랑스군과 달리, 영국은 효율적으로 전투에 임했어요. 우수한 궁수를 확보하기 위해 새 인재를 찾고, 활·화살을 다루는 장인을 우대하기도 했죠. 이런 과거 사례에서 교훈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서민영 경기 군서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민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