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노벨 문학상] 10대부터 고대 시에 푹 빠져… 훗날 실험적 작품 기반됐죠

입력 : 2026.10.21 03:30

[2026 노벨상] <2> 문학상
앤 카슨

올해 노벨 문학상의 영예는 캐나다 시인 앤 카슨(76)이 안았어요. 시인·번역가·에세이스트·고전학자인 카슨은 형식과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작가로 유명해요. 문학상 수여 기관인 스웨덴 아카데미(한림원)는 "고전적 전통과 자유롭고 유희적(놀이를 하듯 즐긴다는 의미)인 대화를 나누며, 현대 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개척한 대담하고 창의적인 작품 세계를 기린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어요.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선 "문헌학자의 집요한 탐구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려는 시인의 열망이 교차한다"고 평했어요.

2026 노벨 문학상을 받은 캐나다 시인 앤 카슨.
▲ 2026 노벨 문학상을 받은 캐나다 시인 앤 카슨.
10대 때 배운 고대 그리스어에서 출발

카슨은 1950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에서 태어났어요. 열다섯 무렵 어느 서점에서 고대 그리스 여성 시인 사포의 시 전집을 읽고 고대 문학의 세계에 풍덩 빠졌어요. 라틴어 선생님이 점심시간마다 틈틈이 가르쳐 준 고대 그리스어로 고전을 읽기 시작했어요. 카슨은 사포·에우리피데스·소포클레스 등 수천 년 전 시인을 벗으로 삼았어요. 이때 그리스 고전이 자신의 인생 주제가 될 것임을 의심의 여지 없이 알았다고 해요. 카슨은 여러 인터뷰와 강연에서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를 향한 애정을 드러냈어요.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 노벨위원회와 통화에서도 '작품의 영감을 어디서 얻었느냐'고 묻자 망설임 없이 "호메로스"라고 답했답니다.

1968년 토론토대에 진학한 카슨은 몇몇 전공 필수 수업을 견디지 못하고 그래픽 디자인을 배우러 학교를 떠났다가, 그리스 시를 공부하려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요. 1974년 학사 학위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해 고대 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아요. 박사 학위 논문은 이후 작품이 돼요.

카슨은 학자로서 프린스턴·맥길·뉴욕·코넬대 등 여러 대학에서 고대 문학을 가르쳤어요. "생업으로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친다"고 짧게 자신을 소개하기도 하고, 방문 교수·학자·작가 등을 전전한 이력에 빗대 유머러스하게 '방문 어쩌고(a visiting whatever)'라고 소개하기도 해요. 건조하고 엉뚱한 유머의 대가예요.

그의 노벨상 수상은 낯선 일이 아니었답니다. 수상에 앞서 이미 현대 문학을 이끄는 세계적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었어요. 캐나다의 유명 문학상인 A. M. 클라인상을 비롯해, 맥아더 펠로십, 구겐하임 펠로십, 그리핀 시문학상 등을 받았어요. 영국의 권위 있는 시 문학상인 'T. S. 엘리엇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기도 해요. 2020년에는 스페인 최고 권위상인 아스투리아스상도 받았답니다. 2022년 아이슬란드 시민권을 취득해 현재 남편과 레이캬비크에 살고 있지요.

8일(현지 시각)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 뒤, 스웨덴 아카데미(한림원)에 카슨의 저서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 8일(현지 시각)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 뒤, 스웨덴 아카데미(한림원)에 카슨의 저서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장르를 거침없이 넘나드는 문학가

카슨이 1986년 발표한 긴 에세이(수필) '에로스, 달콤씁쓸한'은 그의 서양 고전학 박사 학위 논문을 고쳐 쓴 책이에요. 국내에도 번역돼 있어요. 에로스는 그리스 신화 속 사랑과 욕망의 신이자, 문학과 철학에서는 '열정적인 사랑과 강렬한 갈망'을 뜻합니다. 한림원은 그의 이 작품을 "카슨의 문학 세계를 이룰 기초를 다진 작품"이라고 평했어요. 고전시와 현대시뿐 아니라 서로 다른 장르를 넘나들고, 학술적이지만 지적 유희로 가득한 에세이예요. 에로스에 '달콤씁쓸'이라는 표현을 처음 쓴 건 사포였어요. 카슨은 이 책에서 사랑과 증오라는 모순을 지닌 '에로스'가 시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말해요.

1990년대 들어 카슨은 중요한 작품을 잇달아 발표해요. 그의 두 번째 시집인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1995)은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혀요. 번역가인 황유원 시인이 "'시'라는 이름하에 에세이, 산문시, 비평, 번역, 극, 일기, 고전 다시 쓰기를 거침없이 오간다"고 평했듯, 장르를 허무는 실험이 특히 돋보여요. 이 시집에 실린 장시(長詩) '유리 이야기'의 시적 화자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성이에요. 그는 황무지에 사는 외로운 어머니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슬픔에 대해 이야기해요. 카슨은 '폭풍의 언덕'을 쓴 영국 작가 에밀리 브론테(1818~1848)의 삶과 작품 세계를 시적 화자의 상황과 겹쳐 놓으면서 독특한 문학적 효과를 빚어요. 같은 시집에 실린 장시 'TV 인간'에서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트로이 영웅 헥토르, 소포클레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 등 다양한 인물을 TV에 출연시켜 고전과 현대를 뒤섞어요. 카슨은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흐트러뜨리는 작업을 즐긴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시의 형식을 띤 소설 '빨강의 자서전'(1998)이에요. 앤 카슨식의 장대한 서사시라고 봐도 좋아요.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가 화살로 쏘아 죽인 빨간 괴물 게리온을 주인공으로 삼았어요. 헤라클레스와 빨간 날개를 단 외로운 소년 게리온의 사랑 이야기로 다시 썼죠. '녹스'(2010)도 회자되는 작품이에요. 덴마크에서 객사한 오빠 마이클을 기리는 작품으로, 아코디언처럼 펼쳐지는 책이에요. 타향에서 세상을 떠난 형제를 기리는 로마 시인 카툴루스의 시를 번역하는 과정이 펼친 면의 왼쪽에 담겼고, 오른쪽 면에는 카슨의 상념이 담겼어요. 오빠가 쓴 편지, 오빠와 찍은 사진, 오빠가 남긴 유품 등을 수집해 책 속에 담았어요.

카슨의 에세이 '에로스, 달콤씁쓸한'의 국내 번역본.
▲ 카슨의 에세이 '에로스, 달콤씁쓸한'의 국내 번역본. "카슨의 문학 세계를 이룰 기초를 다진 작품"이라는 평을 받습니다.
카슨의 작품 '녹스'입니다. 아코디언처럼 펼쳐지는 독특한 책입니다. /노벨상·AFP 연합뉴스·난다·뉴디렉션스
▲ 카슨의 작품 '녹스'입니다. 아코디언처럼 펼쳐지는 독특한 책입니다. /노벨상·AFP 연합뉴스·난다·뉴디렉션스
문학가, 복싱 글러브를 끼다

현재 카슨은 노화(老化)와 싸우고 있습니다. 2024년 파킨슨병 진단 사실을 밝혔어요. 평단의 극찬을 받은 신작 시집 '롱 노마(Wrong Norma)'를 발표하고 몇 달 지나지 않은 때였어요. 그는 파킨슨병으로 인한 떨림 증상 때문에 손 글씨가 무너졌고, "나 자신이 아니게 된 것 같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어요. 증상 관리를 위해 주 3회 복싱 수업을 듣는다는 카슨은 퇴행성 질환으로 무너진 자신의 필체가 수치스럽지만, 이 '떨림' 또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한순간의 움직임일 수 있다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는 이듬해 '롱 노마'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았습니다. 멈추지 않는 그의 실험과 도전은 독자에게도 떨림을 선사합니다. 감동으로 인한 떨림이지요. 이 시집은 조만간 국내에 번역 출간될 예정입니다. 
황지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