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노벨 물리학상] 지구 관통하는 '우주의 유령'… 남극 얼음에서 잡아냈죠

입력 : 2026.10.20 03:30

[2026 노벨상] <1> 물리학상
중성미자

영화에 나오는 유령처럼 어떤 물질이라도 그냥 통과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우주 만물을 이루는 기본 입자 중 하나인 중성미자입니다. 다른 물질과 거의 반응하지 않고 지나가 '우주의 유령'이라고 부릅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은 남극 얼음 속 천문대인 아이스큐브(IceCube)에서 우주의 유령을 추적해 온 프랜시스 할젠(82) 미국 위스콘신대 매디슨 교수에게 돌아갔습니다.

중성미자는 우주가 탄생한 빅뱅 직후에도 나왔고, 태양의 핵융합이나 원전(原電)의 핵분열 반응에서도 나옵니다. 질량이 거의 없고 전하(정전기의 양)도 띠지 않아 다른 물질과 거의 반응을 하지 않지만, 우주에서 빛의 최소 단위인 광자 다음으로 흔한 입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양에서 날아온 중성미자 650억개가 새끼손톱 하나 크기의 면적(약 1㎠)을 매초 지나가고 있습니다.

할젠 교수는 남극의 얼음 속이라면 다른 간섭을 받지 않고 중성미자가 드물게 다른 원자와 충돌할 때 발생하는 신호를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제안에 따라 남극 아문센-스콧 기지에 아이스큐브가 완공돼 2011년 관측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를 포함해 14국 58개 연구기관의 과학자 450여 명이 공동 연구하고 있지요.

그래픽= 유재일
▲ 그래픽= 유재일
먼 우주 블랙홀에서 나온 중성미자 포착

아이스큐브란 말은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남극의 '얼음 1㎦' 공간이라는 뜻이에요. 과학자들은 남극 얼음 아래에 광센서 5160개를 심어 놓고 중성미자가 아주 드물게 물을 이루는 수소·산소 원자핵과 부딪히는 흔적을 추적해왔습니다. 중성미자가 원자핵에 부딪히면 전하를 띤 입자가 생깁니다. 이 입자는 중성미자와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며 연못에 돌멩이를 던질 때 나타나는 동심원처럼 파란빛을 냅니다. 광센서는 이 신호를 감지합니다.

아이스큐브는 2013년에 처음으로 먼 우주에서 온 고에너지 중성미자를 검출했어요. 2017년에는 고에너지 중성미자가 어디서 나왔는지도 처음으로 확인했습니다. 당시 포착된 중성미자는 에너지가 태양이나 원전에서 나오는 중성미자보다 수백만 배 컸어요. 태양계 밖 먼 우주에서 엄청난 격변이 일어나야 그 정도 에너지를 갖고 지구까지 올 수 있습니다.

중성미자 신호가 나오고 천체망원경과 우주망원경을 총동원해 중성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 추적했습니다. 아이스큐브 연구진은 이듬해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12국 과학자 300여 명의 이름으로 중성미자는 37억 광년(光年·1광년은 빛이 1년 가는 거리로 약 9조4600억㎞) 떨어진 블랙홀에서 나왔다고 발표했습니다.

아이스큐브는 2022년 또다시 '우주의 유령'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냈습니다. 할젠 교수가 이끄는 국제 공동 연구진은 지구에서 4700만 광년 떨어진 고래자리 A은하(NGC 1068)에서 날아온 고에너지 중성미자 79개를 검출했다고 발표했어요. 이 논문에는 377명의 저자 이름이 올라가 있는데, 여기엔 한국 연구자들도 포함돼 있습니다.

중성미자 천문학 시대 열어

우주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면 물질을 이루는 아주 작은 알갱이들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우주가 어떻게 생겨나고 변해왔는지 밝혀내려면 이 폭발을 찾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우주 알갱이의 대부분인 '양성자'(원자핵에서 +전하를 띤 입자)는 자석에 끌리는 쇳가루처럼 우주의 자기장에 이리저리 휘어져 날아옵니다.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죠. 반면 '중성미자'라는 알갱이는 자석의 힘을 전혀 받지 않아(전하를 띠지 않기 때문) 방해 없이 곧장 직진합니다.

남극의 거대 관측 장치인 '아이스큐브'는 바로 이 중성미자를 잡아내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중성미자가 날아온 길을 거꾸로 따라가기만 하면 엄청난 폭발이 일어난 우주 현장을 짚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성미자 천문학' 시대가 열린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일반 빛으로는 볼 수 없었던 우주의 깊은 속을 환히 들여다보게 된 셈이죠. 한 과학자는 이를 두고 "겉모습만 보고 병을 짐작하던 의사가 엑스레이로 몸속을 직접 들여다보게 된 것과 같은 놀라운 변화"라고 설명했습니다.

노벨상 단골, 다섯 번째 수상

중성미자는 노벨 물리학상의 단골 연구 주제입니다. 중성미자 연구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다섯 번째입니다. 미국 과학자들이 1988년과 1995년 각각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이어 고시바 마사토시 도쿄대 교수가 2002년 미국 물리학자 두 명과 함께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수명을 다한 별이 폭발할 때 나온 중성미자를 관측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그 제자인 가지타 다카아키 도쿄대 교수도 중성미자가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종류가 바뀐 것을 관찰해 2015년 캐나다 과학자와 같이 수상했습니다.

중성미자 노벨상은 초대형 연구 시설이 배출했습니다. 일본 과학자들은 폐광에 3000t(톤)의 물을 담은 가미오칸데에서 중성미자를 포착했습니다.

할젠 교수는 물 대신 남극의 얼음을 택했습니다. 가미오칸데와 아이스큐브의 관측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가미오칸데가 하늘에서 내려온 중성미자를 골라냈다면, 아이스큐브는 땅에서 솟아난 중성미자를 찾았습니다. 남극 바로 위에서도 중성미자가 오지만 다른 우주 입자와 섞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면 지구 반대편에서 오면 다른 입자들은 지구를 관통하면서 대부분 걸러지고 중성미자만 남습니다. 지구까지 우주의 잡음을 거르는 필터로 삼은 정말 거대한 과학입니다.
이영완 조선비즈 과학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