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왕의 집무실 겸 생활공간… 샹들리에·카펫도 갖췄대요

입력 : 2026.10.15 03:30

창덕궁 희정당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가 20일부터 31일까지(일·월요일 제외) 하루 두 차례 창덕궁 희정당(熙政堂)과 대조전(大造殿)을 개방하는 행사를 한다고 밝혔어요. 이 두 건물은 왕과 왕비의 생활·집무 공간이었어요.

오늘은 희정당이라는 독특한 궁궐 건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지난 7~11일 궁중문화축전을 맞아 공예 전시와 함께 개방돼 많은 사람이 찾았던 곳이기도 한데, '만약 조선 왕조가 멸망하지 않고 지속됐더라면 모든 궁궐이 이처럼 변모했을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 장소입니다.

창덕궁 희정당 입구입니다. 희정당은 조선 시대 왕의 침소와 생활 공간을 겸한 건물로, 불에 탔다가 다시 지어지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습니다.
▲ 창덕궁 희정당 입구입니다. 희정당은 조선 시대 왕의 침소와 생활 공간을 겸한 건물로, 불에 탔다가 다시 지어지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습니다.
왕의 침소와 생활 공간을 겸했던 건물

희정당은 1405년(태종 5년) 창덕궁을 건립할 때 같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복궁이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 왕조의 정궁(正宮·정식 궁전)이었다면, 창덕궁은 태조의 아들 태종 이방원이 세운 이궁(離宮·따로 지은 궁궐)이었어요. 조선 전기의 왕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머물렀고,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탄 뒤론 창덕궁을 다시 지어 주로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1868년(고종 5년) 경복궁이 중건(왕궁 등을 고쳐 지음)되기까지는 창덕궁이 사실상 정궁 역할을 했습니다.

창덕궁 안에 있던 희정당은 처음에는 수문당(修文堂)이나 숭문당(崇文堂)이라 불렸어요. '수문'은 '글을 닦다', '숭문'은 '글을 높이다'는 뜻이니 임금이 독서를 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은 왕의 침전(寢殿·잠을 자는 건물)과 편전(便殿·평상시 임금이 정무를 보던 집무공간)의 성격을 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숭문당은 1496년(연산군 2년)에 화재로 불탔고, 이를 다시 지으면서 '희정당'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해요. '희정'은 '정치를 빛낸다'는 의미인데, '희'에는 '밝고 넓다'는 뜻이 있습니다.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과는 좀 맞지 않는 이름인 듯합니다.

희정당은 1592년(선조 25년)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창덕궁의 다른 건물과 함께 불탔고, 광해군 때 복구됐습니다. 1623년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한 인조반정 때 화재 피해를 입은 뒤 1647년(인조 25년) 별궁인 인경궁의 화정당을 옮겨 재건했습니다. 이후에도 순조 때 불탔다가 재건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조선 후기에 희정당은 왕의 집무실이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사용됐습니다. 효종이 이곳에서 송시열을 독대(임금과 신하가 다른 사람 없이 만나 정치를 의논하던 일)해서 북벌 문제를 상의했다고 합니다.

1917년 다시 불탄 희정당은 1920년 복구됐습니다. 조선식과 서양식을 절충해 지었어요. 사진은 희정당 내부.
▲ 1917년 다시 불탄 희정당은 1920년 복구됐습니다. 조선식과 서양식을 절충해 지었어요. 사진은 희정당 내부.
조선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궁궐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희정당의 모습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갖춰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17년 11월 희정당은 또 불타서 사라졌습니다. 이때 고종은 덕수궁에, 마지막 황제인 순종은 창덕궁에 거주하고 있었어요. 희정당은 1920년에 복구됐는데, 경복궁의 강녕전(임금이 잠을 자고 생활하던 건물)을 헐어 거기서 나온 자재로 희정당을 새로 지었습니다. 15칸(1칸은 약 2.45m)의 아담한 건물이었던 희정당은 강녕전처럼 55칸의 큰 건물로 바뀌었어요. '조선식과 서양식을 절충해 짓는다'는 방침에 따라 창호지 대신 유리를 덧댔습니다. 남쪽 행각에는 기존의 조선식 건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돌출형 현관을 만들었어요. 여기에는 포치(porch)를 마련했는데, 건물의 입구에 지붕을 갖춰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게 한 곳을 말합니다.

지금 희정당 내부에 들어가 본 사람은 눈을 크게 뜨기 마련입니다. '우리 궁궐이 이렇게 모던하게 변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대청마루였던 곳을 응접실로 개조했고, 온돌방을 접견실과 회의실로 만들어 놓고 카펫을 깔았으며 서양식 가구도 배치했습니다. 천장엔 샹들리에가 달려 있고, 욕실, 화장실, 이발실도 만들어 마치 서양 궁전과도 같은 분위기가 살아 있어요.

하지만 이 건물은 나라가 망한 뒤 순종이 허울 좋은 '이왕(李王·황제가 아닌 격하된 칭호)'이라 불리던 시절의 공간이고, 그나마 1926년 세상을 떠나 6년밖에 거주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순종이 죽은 뒤엔 그의 아우 영친왕이 바로 이곳에서 형식적인 이왕 지위를 계승했습니다. 영친왕은 주로 일본 도쿄에서 생활했죠.

희정당의 벽화인 '금강산만물초승경도'입니다. 가로 8.8m에 달하는 거대한 작품이에요.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국립고궁박물관
▲ 희정당의 벽화인 '금강산만물초승경도'입니다. 가로 8.8m에 달하는 거대한 작품이에요.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국립고궁박물관
세상을 놀라게 한 대형 근대 벽화

그런데 희정당에서 가장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건물 내부에 있는 '벽화'입니다. 실내 벽화는 우리나라 전통 건물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죠. 서양식 프레스코화(벽면에 반죽을 바르고 마르기 전에 그리는 기법)처럼 벽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고 비단 위에 그려 벽에 붙인 것입니다. 20세기 초 미술사에서 이름난 해강 김규진(1868~1933)이 금강산의 절경을 그린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입니다. 가로 8.8m, 세로 약 2m의 거대한 크기로 "전통적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파노라마와도 같은 근대적 시각을 갖춘 뛰어난 작품"(고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창덕궁의 다른 건물에도 이 같은 벽화 4점이 더 있습니다. 대조전에는 '봉황도'(오일영·이용우)와 '백학도'(김은호)가, 대조전의 부속 건물 경훈각에는 '조일선관도'(노수현)와 '삼선관파도'(이상범)가 있죠. 이 벽화들은 2005년에서야 비로소 공개돼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 화재 피해를 입은 창덕궁 건물들이 복구된 1920년에 완성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총독부는 벽화를 일본 화가들이 그리도록 압력을 넣었지만, 순종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영친왕의 스승이었던 김규진과 미술 교육 기관인 서화미술회를 갓 졸업한 김은호·이상범·노수현 등 20대의 젊은 조선 화가들에게 이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순종이 일제에 맞서 자신의 뜻을 관철한 드문 예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창덕궁에 있는 벽화 6점은 모두 진품이 아닙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1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며 습기와 온도 변화로 비단이 찢어지고 안료가 벗겨지는 훼손이 일어나자, 작품을 모두 떼어내 보존 처리 과정을 거친 뒤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 관리하고 있습니다. 원래 벽화 자리에는 모사도나 영인본을 붙여 놓았어요. 사정을 모르고 가면 진품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기획·구성=김민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