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원래 10월 9일이 아니었다? 해례본 공개로 날짜 변경됐죠
입력 : 2026.10.08 03:30
한글과 한글날
오는 9일 한글날은 '한글날 100돌'이 되는 날이에요. 580년 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념해 '한글날'을 만든 지 100주년이 된다는 뜻이죠. 그런데 1926년 처음 정해진 한글날은 10월 9일이 아니었다고 해요. 어떻게 된 걸까요? 오늘은 한글날 100돌을 앞두고 '한글과 한글날의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글자를 무시하다니…"
훈민정음은 1446년(세종 28년)에 반포됐습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는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에 잘 나타나 있어요. 우리말이 중국 말과 다르기 때문에 문자 생활이 불편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또 한글 창제 5년 뒤에 나온 '동국정운'에서 볼 수 있듯이 한자 발음의 정확한 표기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요. 한글 창제의 목적이 한자나 한문의 폐지가 결코 아니었음을 여기서 볼 수 있답니다.
반포 이후 오랫동안 한글은 주류 양반 선비들에게 '언문(諺文·상스러운 글)'으로 불리며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16세기 초 연산군 때는 임금을 비판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자 탄압을 당하는 일도 있었어요. 그런 가운데서도 한글의 생명력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일부 양반과 궁중, 백성, 부녀자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됐고, 이미 15세기부터 '나신걸 편지' 등 한글 편지를 여러 사람이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조선 중기 이후엔 가사 문학, 한글 소설 등 한글로 쓴 문학 작품이 출현했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궁중에서 발전한 단아한 한글 서체가 바로 '궁체'입니다.
19세기 후반 개항과 함께 조선 땅을 밟은 외국인들은 한글을 보고 경악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이고 쓰기 쉬운 문자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채 존재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죠. 선교사이자 교육자였던 호머 헐버트는 "조선인들은 위대한 글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있다"며 놀라워했어요. 그는 띄어쓰기 사용을 권장했고, 그 영향으로 1896년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에 띄어쓰기가 도입됐다고 해요.
"이렇게 위대한 글자를 무시하다니…"
훈민정음은 1446년(세종 28년)에 반포됐습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는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에 잘 나타나 있어요. 우리말이 중국 말과 다르기 때문에 문자 생활이 불편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또 한글 창제 5년 뒤에 나온 '동국정운'에서 볼 수 있듯이 한자 발음의 정확한 표기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요. 한글 창제의 목적이 한자나 한문의 폐지가 결코 아니었음을 여기서 볼 수 있답니다.
반포 이후 오랫동안 한글은 주류 양반 선비들에게 '언문(諺文·상스러운 글)'으로 불리며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16세기 초 연산군 때는 임금을 비판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자 탄압을 당하는 일도 있었어요. 그런 가운데서도 한글의 생명력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일부 양반과 궁중, 백성, 부녀자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됐고, 이미 15세기부터 '나신걸 편지' 등 한글 편지를 여러 사람이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조선 중기 이후엔 가사 문학, 한글 소설 등 한글로 쓴 문학 작품이 출현했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궁중에서 발전한 단아한 한글 서체가 바로 '궁체'입니다.
19세기 후반 개항과 함께 조선 땅을 밟은 외국인들은 한글을 보고 경악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이고 쓰기 쉬운 문자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채 존재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죠. 선교사이자 교육자였던 호머 헐버트는 "조선인들은 위대한 글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있다"며 놀라워했어요. 그는 띄어쓰기 사용을 권장했고, 그 영향으로 1896년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에 띄어쓰기가 도입됐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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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한글 주간 행사에서 외국인들이 한글이 적힌 기념품을 만드는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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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실록 중 훈민정음에 관한 부분입니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잘 표현하지 못하는 백성이 많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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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문화재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이 광복 이후 공개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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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글 연구의 기초를 마련한 주시경(1876~1914)입니다. /뉴스1·조선왕조실록·조선일보 DB
1894년 갑오개혁 때 마침내 한글은 '국문(나랏글)'의 지위에 올라서게 됐습니다. 모든 법령을 국문(한글)을 바탕으로 삼고 한자를 섞어 쓰는 '국한문'으로 하게 됐던 것이죠. 이어 종두법 보급에 공헌한 의사이자 한글학자였던 지석영이 1905년 맞춤법 통일안인 '신정국문'을 고종 황제에게 올렸고,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교육 행정을 담당하던 '학부'에 한글과 한국어 연구 국가 기관인 '국문연구소'가 설치됐답니다.
민간의 연구 활동도 활발했습니다. 한글학자 주시경은 '대한국어문법'과 '국어문법'을 출간했을 뿐 아니라 '언문'이라 불리던 한글에 '한글'이란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했습니다. 주시경은 1908년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했습니다. 이 단체는 1921년 이름을 '조선어연구회'로 바꿨고, 1926년 한글날을 제정했습니다.
이 해는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이었어요. '세종실록'의 훈민정음 반포 기사가 1446년 음력 9월 29일에 실렸기 때문에 1926년의 음력 9월 29일에 해당하는 11월 4일에 기념식을 거행한 겁니다. 이 당시만 해도 아직 '한글'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가갸날'이라 했습니다. 1928년이 돼서야 비로소 '한글날'이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설날이나 추석처럼 해마다 양력으로는 다른 날이 한글날이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1446년 9월 29일을 아예 양력인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해 1931년 10월 29일에 행사를 열었습니다. 1934년부터는 양력인 그레고리력으로 다시 환산해 10월 28일이 한글날이 됐지요.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과 '양력 10월 9일'
그런데 1940년에 실로 엄청난 문서가 발견됩니다. 그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이었어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뒤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해 집필한 한글의 해설서였습니다. 그러나 기록에만 나올 뿐 전해지지 않았는데,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한 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문화재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이 당시 큰 기와집 10채 값인 1만원을 주고 입수해 보관하고 있었어요.
조선일보•동아일보가 벌이던 한글 보급 운동을 강제로 금지시킨 일제는 1930년대 말부터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한글·한국어 교육을 폐지했습니다. 1942년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한글 연구 단체도 탄압했습니다. 일제 말기, 한글은 암흑 속에 들어간 듯했습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전형필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학계에 알렸습니다. 한글이 발음 기관의 모습을 따서 만들어졌다는 독창적인 제자(制字) 원리가 비로소 확실해졌습니다. 또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이 있었죠. 책이 발간된 시점이 1446년 음력 9월 상순(1~10일)이라고 해례본에 기록돼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글날도 날짜 변경이 필요해졌습니다. '상순'의 마지막 날인 '9월 10일'로 상정하고 훈민정음이 반포된 1446년의 음력 9월 10일을 양력(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니 '10월 9일'이 됐던 것이죠. 이렇게 해서 1945년 해방 이후부턴 10월 9일을 한글날로 기념하게 됐습니다. 정부 수립 다음 해인 1949년 한글날은 공휴일로 지정됐죠.
그런데 1991년 '10월에 공휴일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공휴일에서 빠지게 됐습니다. 2006년에는 국경일이 됐으나 쉬는 날은 아니었고, 2013년이 돼서야 다시 공휴일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현행 국어기본법 제20조엔 "정부는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범국민적 한글 사랑 의식을 높이기 위하여 매년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한다"고 돼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