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밌다, 이 책] 세상을 바꾼 불멸의 세포… 그 뒤에 잊힌 한 여성의 삶
입력 : 2026.10.01 03:30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
1988년 미국의 한 생물학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세포 분열을 설명하던 선생님이 칠판에 이름 하나를 크게 적었습니다. '헨리에타 랙스'. 1951년 자궁경부암으로 숨진 여성인데, 그의 몸에서 떼어낸 암세포가 실험실에서 처음으로 죽지 않고 계속 자라는 인간 세포가 돼 현대 의학의 중요한 도구가 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흑인 여성이었다"라고 덧붙인 뒤 이름을 쓱 지웠습니다.
교실에 앉아 있던 열여섯 살 소녀는 궁금해졌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세포를 남긴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이는 있었을까? 그 소녀가 훗날 과학 저널리스트가 된 저자입니다. 그가 10여 년에 걸쳐 헨리에타와 가족의 삶을 추적한 결과가 바로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입니다.
헨리에타는 미국 버지니아의 담배 농장에서 자란 가난한 흑인 여성이었습니다. 1951년, 다섯 아이의 엄마였던 서른 살의 헨리에타는 몸에 이상을 느껴 존스홉킨스 병원을 찾았습니다. 당시 흑인 환자를 받아주는 몇 안 되는 대형 병원이었지요. 의사는 마취된 헨리에타의 몸에서 암 조직을 떼어 연구실로 보냈습니다. 연구에 쓰겠다는 설명도, 동의를 구하는 절차도 없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까지 사람 몸 안에서 떼어내 키운 세포는 얼마 못 가 죽었지만 헨리에타의 몸에서 떼어낸 암세포는 죽지 않고 24시간마다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먹이와 공간만 있으면 계속 자랐지요. 연구자들은 이름 '헨리에타(Henrietta)'와 성 '랙스(Lacks)'의 앞 두 글자씩을 따 이 세포를 '헬라(HeLa)'라고 불렀습니다. 그해 가을 헨리에타는 세상을 떠났지만 헬라는 죽지 않았습니다. 세계 곳곳의 연구실로 퍼진 헬라는 소아마비 백신을 시험하고 인간의 염색체를 연구하는 데 쓰였고, 우주에까지 다녀왔습니다. 지금까지 배양된 헬라 세포를 모두 합치면 5000만t(톤) 이상일 것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정작 가족은 이 사실을 20년 넘게 몰랐습니다. 1973년 헨리에타의 며느리가 우연히 만난 연구자에게서 듣고서야 알게 됐지요. 당시에는 환자에게 알리지 않고 조직을 연구에 쓰는 일이 흔했고 이를 금지하는 법도 없었습니다. 훗날 기업들이 헬라를 판매하며 거대한 산업이 생겨나는 동안, 랙스 가족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가장 아프게 보여주는 사람은 딸 데보라입니다. 두 돌 무렵 어머니를 잃었어요. 세상은 헬라를 알았지만 딸은 헨리에타를 몰랐던 것입니다. 2001년 처음으로 현미경을 통해 어머니의 세포를 본 데보라는 "아름답다"고 속삭입니다. 과학자들에게는 연구 재료였던 세포가 데보라에게는 어머니의 일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