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당나라 끌려간 의자왕, 일본 '도자기 시조'가 된 이삼평

입력 : 2026.10.01 03:30

전쟁 포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된 북한군 중 우크라이나군에 생포된 2명이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협의를 거쳐 최근 한국으로 송환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송환(送還)은 '포로 등을 본국으로 도로 돌려보내는 것'을 뜻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상 북한 사람도 우리 국민입니다. 두 포로의 의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이번 협의와 송환이 이뤄졌다고 해요.

예로부터 전쟁은 수많은 피해를 낳았고, 동시에 많은 포로가 생기게 했습니다.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쟁 포로가 발생했지요. 비참한 처지에 놓이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중국에서 숨 거둔 의자왕

왕도 포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의 이야기입니다. 660년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함락됐어요. 의자왕과 왕자들은 물론, 1만명이 넘는 백성이 당나라로 압송됐어요. 당시 수많은 백성이 포로가 된 의자왕을 두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중국에 도착한 의자왕은 당나라 황제에게 꾸짖음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어요. 그는 곧 병에 걸려, 먼 이국땅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현재 충남 부여군에 의자왕의 무덤이 있지만, 중국에서 의자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의 흙을 퍼와 만든 가묘(假墓)입니다.

668년 멸망한 고구려의 보장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역시 당나라로 끌려갔어요. 보장왕은 당나라의 눈을 피해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는 노력을 했지만, 결국 발각돼 변방으로 쫓겨났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모두 여섯 번이나 몽골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포로가 됐는데, 1254년에 끌려간 고려인만 20만명이 넘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예요.

우크라이나군에 붙잡혔다가 최근 국내로 송환된 북한군 포로 백모(왼쪽)씨와 리모씨입니다. /정철환 기자
▲ 우크라이나군에 붙잡혔다가 최근 국내로 송환된 북한군 포로 백모(왼쪽)씨와 리모씨입니다. /정철환 기자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이 만든 찻잔입니다. 한글로 적힌 시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마음이 담겨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이 만든 찻잔입니다. 한글로 적힌 시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마음이 담겨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간 도공 이삼평을 기리는 일본 사가현의 비석입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 청나라는 글을 잘 다루거나 기술이 좋은 조선인을 포로로 사로잡았습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간 도공 이삼평을 기리는 일본 사가현의 비석입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 청나라는 글을 잘 다루거나 기술이 좋은 조선인을 포로로 사로잡았습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숙종실록 중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로 끌려간 안단이라는 조선인에 관한 부분입니다. 그는 고향 땅을 밟으려 40여 년 만에 국경에 닿았지만 결국 다시 중국으로 끌려갔다고 해요.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중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로 끌려간 안단이라는 조선인에 관한 부분입니다. 그는 고향 땅을 밟으려 40여 년 만에 국경에 닿았지만 결국 다시 중국으로 끌려갔다고 해요. /조선왕조실록
찻잔의 시에 담긴 그리움

조선 역사에서 대규모 포로가 발생한 대표적 전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입니다. 두 전쟁에서 각각 포로가 수만 명 이상 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병사들은 고된 이송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어린아이나 노인은 죽게 내버려 두었고, 몸이 튼튼한 젊은 남녀를 주로 데려갔어요.

기술을 가진 공인, 그리고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유학자들이 많이 끌려갔습니다. 이 중에서는 현지의 학문·문화에 영향을 끼친 이도 있었어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납치된 도예가 이삼평은 현지에서 백자의 원료를 발견하고 조선의 선진 도자기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백자를 재현했어요. 이때를 '일본 도자기 공예가 비로소 시작된 시점'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어요. 일본에서는 이삼평을 '일본 도자기의 시조'로 추앙한대요. 또 일본으로 끌려간 유학자 강항은 현지 학자들과 교류했어요. 일본 학자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그가 답해주곤 했죠. 그를 존경한 일본인들의 노력 등으로 그는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가족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어요. 이후 그는 포로들이 적국에서 당한 참상과 그곳에서 보고 들은 실정을 적은 '간양록'을 썼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포로는 비참한 생을 보냈어요. 포로로 끌려가다 폭행과 굶주림, 질병에 시달려 도착하기도 전에 죽는 경우도 많았고, 이 모든 것을 견뎌내 외국 땅에 도착한다고 해도, 살아남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찻잔에는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의 도공이 만든 한글 시가 적혀 있습니다. "한밤중에 개가 짖어댄다. '짖지 마라, 내가 조선 사람들 만나고 돌아오는 거다' 하고 말을 하자 개가 갑자기 짖지 않았다. 혹시 저 개도 조선의 개일까?" 짧고 간단한 시조이지만, 머나먼 이국에서의 외로움 속에서도 조선 사람끼리 서로 의지하며 버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고향과 가족을 떠난 아픔은 수백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도자기 위의 슬픈 글씨로 남아 있습니다.

탈출했지만 도로 돌려보내지기도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지만 다시 돌려보내지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습니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 포로를 자기 나라의 재산이자 노동력으로 여긴 청나라는 만약 조선이 전쟁 포로들을 숨긴다면 용납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래서 청나라를 탈출해 조선으로 돌아온 포로 가운데 상당수는 다시 청나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1640년 인조는 이 일을 안타까워하며 말했습니다. "우리 백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온갖 죽음을 무릅쓰고 돌아왔는데 또다시 몰아서 보내니 이토록 놀랍고 참혹한 정상이 또 있겠는가."

숙종 때인 1675년, 안단이라는 조선인이 도망쳐 국경에 도착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병자호란이 벌어진 지 무려 40여 년이나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이미 노인이 된 안단은 자신이 조선인이라 밝히고 친척의 이름을 대며 조선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결국 고국 땅을 한 발자국도 밟아보지 못한 채 다시 중국으로 끌려갔습니다. 안단은 슬퍼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국 땅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도 죽을 곳으로 보낸다."

지금은 과거와는 다릅니다. 포로를 나라의 재산으로 취급하고, 탈출해 돌아온 이들조차 돌려보내야 했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국제법을 통해 인도적 권리를 보호받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전쟁 포로는 여전히 발생합니다. 전쟁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일도 여전합니다. 전쟁이라는 비극 앞에서도 개인의 자유와 인권은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한 작가·'한잔 술에 담긴 조선' 저자 기획·구성=김민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