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전쟁으로 기름값 4배 뛰자… 대통령은 선풍기도 껐대요
입력 : 2026.09.17 03:30
1·2차 오일 쇼크
중동의 위기가 다시 격화하면서 유가(기름값)가 배럴(약 159L)당 120달러를 넘어섰어요. 두 달 사이 가격이 50% 넘게 오르는 등 글로벌 원유 시장이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7월 국내 휘발유 소비량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해요. 정부가 석유 최고 가격제를 통해 시장가격을 억누르면서, 오일 쇼크급(級) 위기 상황에서도 에너지 절약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여기서 '오일 쇼크'가 뭘까요? 역사적으로 1970년대 두 차례 있었던 '석유 파동'을 가리킵니다. 당시 유가가 크게 올랐기 때문에 자원이 부족하고 수출 주도형 경제 구조였던 우리나라는 뼈를 깎는 듯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지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의 석유 파동
대한민국 제4공화국 출범 다음 해인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시리아 사이의 전쟁이었는데 중동 여러 국가가 참여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이 나라들은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통해 석유 생산을 줄이는 동시에 원유 가격을 인상했습니다. 배럴당 2.8달러 수준이던 유가가 이듬해 3월까지 11달러로 4배 가까이 뛰어올랐죠. '제1차 석유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세계 경제가 타격을 입는 가운데, 신흥 개발도상국으로서 막 중화학공업에 뛰어들었던 한국은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원유를 수입해야 하는 입장에서, 원자재 가격 폭등과 물가 급등, 무역수지 적자가 발생했던 것이죠.
그해 11월 8일, 정부는 '에너지 소비 절약 1단계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난방 유류의 5%를 절감하고, 2㎞ 정도는 걸어서 가는 운동을 펼친다. 대낮 소등(불을 끔)을 생활화하며, 광고 네온사인과 목욕탕 신규 허가를 규제한다." 전방위적으로 기름을 아끼자는 것이었죠. 신문 제목은 거의 날마다 '인상(引上)'이란 말로 뒤덮였고, 밤거리는 어두워져 뺑소니 사고도 늘어났습니다. 일부 사람은 화장지와 비누·라면 같은 생필품 사재기에 나섰습니다.
여기서 '오일 쇼크'가 뭘까요? 역사적으로 1970년대 두 차례 있었던 '석유 파동'을 가리킵니다. 당시 유가가 크게 올랐기 때문에 자원이 부족하고 수출 주도형 경제 구조였던 우리나라는 뼈를 깎는 듯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지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의 석유 파동
대한민국 제4공화국 출범 다음 해인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시리아 사이의 전쟁이었는데 중동 여러 국가가 참여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이 나라들은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통해 석유 생산을 줄이는 동시에 원유 가격을 인상했습니다. 배럴당 2.8달러 수준이던 유가가 이듬해 3월까지 11달러로 4배 가까이 뛰어올랐죠. '제1차 석유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세계 경제가 타격을 입는 가운데, 신흥 개발도상국으로서 막 중화학공업에 뛰어들었던 한국은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원유를 수입해야 하는 입장에서, 원자재 가격 폭등과 물가 급등, 무역수지 적자가 발생했던 것이죠.
그해 11월 8일, 정부는 '에너지 소비 절약 1단계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난방 유류의 5%를 절감하고, 2㎞ 정도는 걸어서 가는 운동을 펼친다. 대낮 소등(불을 끔)을 생활화하며, 광고 네온사인과 목욕탕 신규 허가를 규제한다." 전방위적으로 기름을 아끼자는 것이었죠. 신문 제목은 거의 날마다 '인상(引上)'이란 말로 뒤덮였고, 밤거리는 어두워져 뺑소니 사고도 늘어났습니다. 일부 사람은 화장지와 비누·라면 같은 생필품 사재기에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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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너지 소비 절약 1단계 조치'를 보도한 1973년 11월 9일 자 조선일보 기사예요. 차량·난방용 유류 사용을 5% 줄이고 가까운 거리는 걸어서 가도록 권장하는 내용 등이 담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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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년 정부가 개최한 '에너지 10% 절약 열관리 궐기 대회' 모습이에요. 정부는 1차 석유 파동을 계기로 국민적인 에너지 절약 운동을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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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년 석유 가격 인상 소식이 전해지자 기름을 미리 사두려는 사람들이 주유소 앞에 길게 줄을 선 모습이에요 /조선일보DB·국가기록원
정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석유 사용량을 10% 줄이자"는 더 강력한 운동을 펼쳤습니다. 관공서는 전구의 3분의 1을 뺐고, TV 방영은 하루 4시간 단축돼 아침 방송이 사라졌습니다(1981년 재개). 1974년 1월 14일의 '긴급 조치 3호'는 저소득층 부담을 줄이고 당시만 해도 '사치품'이었던 TV와 냉장고에 대한 세금을 늘렸습니다. 대통령조차 한여름에 선풍기를 끄고 창문을 연 채 파리채를 들고 살았습니다. 에어컨을 틀면 되지 않았겠느냐고요? 당시 청와대엔 에어컨이 아예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강도 높은 에너지 절약은 효과를 거뒀습니다. 1차 석유 파동 다음 해인 1974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9.5%였고, 수출은 전년 대비 38.3%가 늘었습니다.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1972~1976) 동안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1%였습니다. 2025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1.1%인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발전이죠. 심각한 물가 상승 속에서도 수출 증대와 중화학공업 육성이라는 계획을 계속 진행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중동에 낸 석윳값을 다시 찾아오자'는 발상을 하게 된 거예요. 중동에 공장을 짓고 건설 인력을 수출하는 이른바 '중동 진출'이었죠. 그 절정을 이룬 1978년 중동에서 소금땀을 흘린 한국 노동자는 14만명이 넘었고, 1975~1978년 중동에서 벌어들인 205억달러는 같은 기간 총 수출액의 40%에 육박했습니다.
시험지 아끼려고 말로 시험문제 내기도
그러던 1979년, 석유 시장에 다시 암울한 구름이 몰려왔습니다. 이란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새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원유 가격은 다시 2~3배 폭등했습니다. 이미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고 있던 한국은 석유 의존도가 훨씬 높아졌기 때문에 고통도 컸습니다. 1979년 우리나라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18.3%, 1980년엔 무려 28.7%나 됐죠.
당시 학교에선 시험지를 아끼려고 교사가 말로 문제를 내 시험을 치르는 일도 있었고, 공책에는 앞뒤 표지 안쪽에도 필기를 할 수 있도록 밑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몽당연필은 꼭 낡은 볼펜 자루에 끼워 끝까지 쓰도록 했죠.
직장에선 직원을 줄이고 임금 체불을 하는 일이 늘어났고, 리어카와 용달차를 동원한 사재기가 또 일어났어요. 이 당시 지어진 상당수 구축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한 층을 건너뛰어 서도록 돼 있는 것도 석유 파동의 영향이었습니다.
2차 석유 파동과 3저 시대
2차 석유 파동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10·26 사태가 일어나 정치적 혼란이 겹쳤고, 한국 경제는 최대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1980년의 경제성장률은 -1.6%로 정부 수립 이래 첫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마이너스 성장은 1998년 IMF 외환 위기(-5.1%), 2020년 코로나 팬데믹(-0.7%) 등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사례입니다. 2차 석유 파동은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겹치는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정부는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등을 중심으로 강력한 긴축 재정, 통화량 관리, 중화학공업의 중복·과잉 투자에 대한 구조조정 등을 단행했습니다. 이후 1980년대 중반 '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 시대'에 한국 경제가 다시 도약하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제 규모와 수준은 1970년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아낌없이 에어컨을 틀면서도 현관을 열어 두는 상점, 여전히 도로를 꽉 채운 자동차들을 보며 '과연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에너지를 펑펑 쓸 수 있을 것인가'라며 걱정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