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밌다, 이 책] 일제의 탄압 피해 독일로 떠난 의학도… 암울한 상황에도 운명 탓하지 않았죠

입력 : 2026.09.14 03:30
[재밌다, 이 책] 일제의 탄압 피해 독일로 떠난 의학도… 암울한 상황에도 운명 탓하지 않았죠
이미륵 지음|안삼환 옮김|출판사 민음사|가격 1만4000원

이미륵(1899~1950·본명 이의경)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다닐 때 3·1 운동에 참가한 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일로 망명했습니다. 뮌헨대학에서 동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난 후 작가로 활동했습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그가 독일어로 쓴 자서전 성격의 소설입니다. 소설의 '나'는 이미륵 자신입니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훈장 선생님에게 한문을 배웠습니다. 틈틈이 제기도 차고 연도 날렸습니다. 연을 만드는 데 종이를 썼다는 이유로 회초리를 맞기도 했어요. 열한 살 때부터 신식 학교에서 수학과 자연과학, 세계 지리와 역사를 배웠습니다. 신식 학문을 싫어하는 누나에게 내가 말했습니다. "다른 시대가 온 거야. 어두운 잠을 자고 나니 더 밝은 시대가 온 거지."

나는 우리가 지혜로운 민족이며 일본에 문자·철학·종교·건축 기술을 전해줬지만, 새로운 문화를 들여오는 데 일본이 약간 앞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군인들이 곳곳을 수색하고 행진했습니다. 학교 친구가 말했습니다. "우리나라가 합병됐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었습니다. 나는 일본어를 배워야 했고 역사 과목은 전부 새로 배워야 했습니다. 한민족이 독자적 역사를 가진 민족이 아니라, 예로부터 일본에 조공을 바쳐야 했던 변두리 세력으로 바뀌었습니다.

혼란 속에서도 나는 의학을 가르치는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왔습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일본 통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됐습니다. 나를 비롯한 의학도들도 참가했습니다. 우렁찬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후 나는 독립운동 비밀 조직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당할 위험에 처했습니다. 일단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유럽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라고 하셨지요.

헤어지면서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넌 내 인생에 대단히 많은 기쁨을 선사해주었다. 자, 내 아들, 이제 혼자 계속 가거라!" 강을 건넌 나는 언덕 위에 올랐습니다. 압록강은 석양으로 반짝이며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작은 도시에 자리 잡은 나는 겨울 아침에 흰 눈송이들이 바람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날 고향에서 첫째 누님이 쓴 편지가 왔습니다. 어머니께서 지난가을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소설은 압록강이 조용히 흐르듯 작가 자신의 삶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전합니다. 이미륵은 암울한 상황에서도 운명을 탓하거나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올바름에 대한 소신을 지키며 자기 삶에 충실했습니다. 그런 그를 많은 독일인이 존경했고, 이 소설은 독일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