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명화 돋보기] 산이 품은 사계절의 얼굴… '원색 추상화'로 빚어냈어요

입력 : 2026.09.07 03:30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시

화가 유영국(1916~2002)은 김환기, 한묵 등과 더불어 '한국 추상화의 제1세대'로 불립니다. 그가 태어난 지 110주년이 되는 올해, 그의 작품을 총망라하는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시가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10월 25일까지 진행됩니다. 무료로 진행되는 이 전시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유영국 그림 속에는 사람이 등장하는 일은 없습니다. 화가가 1960년대부터 줄곧 예술의 주제로 삼은 것은 한국의 산이었어요. 그림 제목도 구체적이지 않고, '작품'이라든지 '산'으로 붙인 것이 많지요.

늘 꿋꿋이 서 있는 산

한국에서는 어디서든 산을 볼 수 있습니다. 전 국토가 산줄기를 끼고 있어 병풍처럼 둘러싼 산이 아늑하게 우리를 지켜주고 있지요. 역사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겪을 때마다 우리 민족은 저기 잘 버티고 있는 산을 보면서 마음을 굳건히 세우곤 했을 겁니다. 유영국에게도 산은 항상 거기 서 있고, 늘 마음속에 있는 고향과도 같은 존재였어요.

유영국의 고향 경북 울진에서는 동쪽으로 바다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산이 보였어요. 성장하는 동안 그가 줄곧 바라봤던 산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유영국은 산처럼 변함없이 절대적인 것을 기준으로 삼아 살고 싶었고, 또 그것을 화면에 담고 싶었어요. 한 번만 봐서는 전부를 알 수 없고 매번 다른 느낌을 자아내는 산의 다채로움이 유영국의 붓을 부지런히 움직이게 했고, 그 흔적은 캔버스마다 남아 있습니다. 작품을 몇 점 예로 들면서 그가 산에서 어떤 영감을 얻었는지 알아보기로 해요.

유영국이 1964년 발표한 ‘작품’입니다. 그는 많은 그림에 ‘작품’ ‘산’이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1964년 작품은 흰색, 초록색, 푸른색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유영국이 1964년 발표한 ‘작품’입니다. 그는 많은 그림에 ‘작품’ ‘산’이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1964년 작품은 흰색, 초록색, 푸른색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붉은색을 활용한 1968년 ‘작품’입니다. 강렬한 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요.
붉은색을 활용한 1968년 ‘작품’입니다. 강렬한 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요.
1977년 ‘작품’은 봉우리 두 개가 울긋불긋 도드라지게 빛나는 게 인상적이에요.
1977년 ‘작품’은 봉우리 두 개가 울긋불긋 도드라지게 빛나는 게 인상적이에요.
‘산-블루’(1994년)입니다. 점, 선, 면, 색이라는 회화의 기본 요소로 산을 추상화했어요.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산-블루’(1994년)입니다. 점, 선, 면, 색이라는 회화의 기본 요소로 산을 추상화했어요.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찬란한 색채의 에너지

유영국의 작품과 마주하면 산의 형상을 찾기에 앞서, 화면 가득 채워진 선명한 색채에 몸도 마음도 전부 흡수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화가는 자연을 보는 것에서 출발하되 그 모습을 일일이 옮겨 그리는 대신, 전체적인 느낌을 끌어모아 색채의 에너지로 바꾸었어요. <그림 1 '작품'(1964)>을 보세요. 눈처럼 새하얀색이 양쪽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초록색과 어두운 푸른색이 그 뒤로 물러나는 듯해요. 세 가지 색채가 대비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운데에서 노란색 한 가닥이 어둠이 내리기 전 마지막 남은 빛처럼 순간적으로 반짝이네요.

산은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지만, 그렇다고 늘 똑같은 것은 아니지요. 아침 햇살과 저녁 노을, 그리고 봄에서 겨울에 이르기까지 빛과 날씨에 따라 색을 바꾸니까요. 아마도 산은 백 가지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그림 2 '작품'(1968)>은 화면 전체를 붉은 색조로 산뜻하고 뚜렷하게 칠한, 불꽃 같은 강렬한 산의 모습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림 3 '작품'(1977)>은 아른거리며 불어오는 나무숲의 바람결처럼 보드랍게 윤곽선을 처리한 산이에요. 봉우리 두 개가 울긋불긋 도드라지게 빛나고, 그 주위에 보랏빛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죠.

유영국에게 산은 실제 풍경이면서 동시에 마음에 담긴 기억들이기도 해요. 산을 여러 차례 그리는 동안 화가는 산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유영국은 말한 적 있어요. 화가의 예술관이 이 한마디에 압축돼 있습니다. 마음속 꿈틀거리는 산의 생명력이 캔버스 위에서 원색들로 울렁이며 에너지를 뿜어대고 있지요.

산을 닮은 화가의 우직함

<그림 4 '산-블루'(1994)>를 보세요. 네모의 선들이 줄을 맞춰 배치돼 있고, 그 안팎으로 선을 맞춰 깔끔하게 칠한 푸른색 계열의 면들, 그리고 노랑과 빨강 점으로 산을 구성했어요. 점, 선, 면, 색이라는 회화의 기본 요소로 산을 추상화한 것이죠. 이 작품을 그린 해는 1994년으로, 화가가 노년기를 맞았을 무렵이었어요. 세상을 한결 넓고 멀리, 더 여유롭게 바라보기 시작했어도 그는 그림 앞에서만큼은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우직하게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평소 유영국은 시간에 엄격했습니다. 작업하는 방이 집에 있었지만, 결코 느슨하게 생활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어김없이 작업실에 들어갔고, 12시가 되면 점심을 들었어요. 이후 저녁 6시까지 휴식 없이 그림을 그렸어요. 작업에만 몰두하기 위해 교수직도 그만두었는가 하면, 병원에서 큰 수술을 몇 차례 받고 수십 번 입원했지만 퇴원 후에는 바로 자신의 작업 규칙으로 돌아가곤 했어요. 그는 대부분의 작업을 조수 도움 없이 직접 했습니다.

"요즈음 내가 그림 앞에서 느끼는 팽팽한 긴장감, 그 속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각오와 열의를 배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긴장의 끈을 바싹 나의 내면에 동여매고 작업에 임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당장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동요하지 않고, 오직 그림 그리기에만 집중했어요. 결국 약 800점에 이르는 대작들을 남겼습니다. 관람자들은 유영국의 그림을 보고 먼저 그 세련된 색채와 에너지에 놀라고, 다음으로 산을 닮은 화가의 우직한 꾸준함에 감동을 받고 돌아간답니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김민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