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꼭 읽어야하는 고전] 독방 속 외로움에서 구해준 체스, 결국 자신 지배하는 덫이 됐어요

입력 : 2026.09.03 03:30

체스 이야기

[꼭 읽어야하는 고전] 독방 속 외로움에서 구해준 체스, 결국 자신 지배하는 덫이 됐어요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최은아 옮김|출판사 세창출판사|가격 8000원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은 물론이고 책 한 권, 시계 하나 없이 텅 빈 방에 홀로 갇힌다면 우리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슈테판 츠바이크의 '체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B 박사는 바로 이런 고립 속에 던져진 인물입니다. 오스트리아의 변호사였던 그는 황실과 수도원의 재산을 관리했습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장악하자 비밀경찰 게슈타포는 숨겨진 자금과 정보를 캐내기 위해 그를 체포합니다. 그가 끌려간 곳은 게슈타포 본부로 쓰이던 호텔 메트로폴의 독방. 나치는 책과 신문, 시계를 빼앗아 스스로 정신이 무너지게 만드는 심리적 고문을 가했습니다.

몇 달째 같은 벽과 침대만 바라보던 그는 심문을 기다리다 책 한 권을 훔칩니다. 체스 명승부 150판을 기록한 책이었죠. 그는 빵 부스러기로 말을 만들고 체크무늬 침대보를 판으로 삼아 경기를 따라 합니다. 얼마 뒤에는 체스판을 통째로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게 되지요. 체스 덕분에 그는 정신도 또렷해집니다. 하지만 150판을 모두 외우자 더 이상 새로운 경기가 없습니다. 결국 그는 머릿속에 '백을 두는 나'와 '흑을 두는 나'를 만들어 자기 자신과 체스를 둡니다. 하지만 이는 내가 둘 수를 이미 알면서도 동시에 모르는 척해야 하는 불가능한 게임입니다. 결국 그는 심한 착란에 빠집니다. 자신을 살린 것이 다시 자신을 파괴한 셈입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의사의 도움으로 풀려나 오스트리아를 떠납니다. 훗날 뉴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는 여객선에서 다시 체스판을 마주합니다. 배에는 세계 챔피언 미르코 첸토비치가 타고 있습니다. 체스 밖에서는 오만하지만 체스에선 누구도 쉽게 꺾지 못하는 천재입니다. 결국 두 사람의 대결이 성사됩니다.

둘의 재능은 정반대입니다. 첸토비치는 실제 판 없이 머릿속으로 두는 '블라인드 체스'를 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B 박사는 판 없이도 몇 수 앞을 읽어냅니다. 한 사람은 눈앞의 체스판이 필요하고, 다른 한 사람은 머릿속 체스판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첫 대국에서 B 박사는 세계 챔피언을 꺾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경기에서 첸토비치는 일부러 한 수 한 수를 오래 끌며 그의 초조함을 자극합니다. 급기야 B 박사는 눈앞의 경기와 머릿속의 다른 경기를 혼동하고, 오래전 독방을 떠올립니다. 결국 대국을 중단하지요.

이 책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망명했던 츠바이크가 1942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남긴 마지막 소설입니다. 그는 시대의 폭력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작은 독방과 64칸짜리 체스판만으로 고립이 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살아남기 위해 붙잡은 것이 어떻게 집착이 되는지를 팽팽하게 보여줍니다. 외로움 속에서 무언가에 깊이 빠져본 사람이라면 B 박사의 위안과 집착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어느 순간 나를 지배하는 덫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진혁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