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세계 미술관 산책] 폐허 된 기차역… 전쟁·분단 상처 딛고 '예술 실험실' 됐죠

입력 : 2026.08.31 03:30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

우리 동네 기차역이 어느 날 문을 닫고 오랫동안 텅 비어 있다면 어떨까요? 방치된 큰 건물은 위험한 공간이 되거나 도시의 흉물이 되기 쉬워요. 하지만 독일 베를린에는 버려진 옛 기차역을 창의적인 현대미술관으로 바꾼 곳이 있어요. 바로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이랍니다.

오래된 건물을 없애고 새로 짓는 대신, 시간의 흔적을 남겨둔 채 그 안에 새로운 예술을 채워 넣은 곳. 함부르거 반호프는 '재건'이란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위에 새로운 미래를 쌓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아픈 역사 위에 창의적인 미래를 지어 올린 이 미술관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버려진 역의 대변신

'반호프(Bahnhof)'는 독일어로 기차역이란 뜻이에요. 함부르거 반호프는 베를린과 함부르크를 잇는 철도의 베를린 쪽 종착역으로 1846년 문을 열었습니다. 이름은 '함부르거'이지만, 이 역은 베를린에 있어요. 함부르크행 열차가 출발한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기차역으로서의 삶은 그리 길지 않았어요. 불과 400m 떨어진 곳에 더 큰 역이 들어서면서 개장 38년 만인 1884년에 철도역으로서의 수명을 다하고 말았거든요. 이후 철도 박물관 등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피하진 못했어요. 폭격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된 데다 동독과 서독으로 베를린이 분단되면서 이 역은 비무장 경계 지대 근처에 덩그러니 방치됐어요.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품은 이 공간이 반전을 맞이한 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부터예요. 베를린시는 이 건물을 허물어버리는 대신 역사적 가치를 살려 미술관으로 재건하기로 결정했어요. 건축가 요제프 파울 클라이후스의 대대적인 개조를 거쳐 1996년 11월, 함부르거 반호프는 현대미술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답니다. 2004년에는 뒤편 300m 길이의 옛 화물 창고까지 전시장으로 연결하면서 규모가 크게 확장됐어요.

독일 베를린의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입니다. 이곳은 원래 기차역이었어요. 작은 사진은 1850년 기차역일 때 모습.
독일 베를린의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입니다. 이곳은 원래 기차역이었어요. 작은 사진은 1850년 기차역일 때 모습.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에 전시된 앤디 워홀의 '마오' 초상화입니다. 워홀은 중국의 초대 주석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여럿 제작했고 그중 하나가 이곳에 있습니다.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에 전시된 앤디 워홀의 '마오' 초상화입니다. 워홀은 중국의 초대 주석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여럿 제작했고 그중 하나가 이곳에 있습니다.
독일 작가 카타리나 그로세가 2020년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에서 선보인 전시입니다. 대형 분사 장비로 건물 외벽에 그림을 그렸어요.
독일 작가 카타리나 그로세가 2020년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에서 선보인 전시입니다. 대형 분사 장비로 건물 외벽에 그림을 그렸어요.
'우리는 시간으로 세월을 만든다' 전시에서 사람들이 나무 조각을 쌓고 있어요. 관람객들의 공동 작업 과정 자체가 예술 작품이 되는 거예요. /이은화 미술평론가·위키피디아·베를린 국립박물관
'우리는 시간으로 세월을 만든다' 전시에서 사람들이 나무 조각을 쌓고 있어요. 관람객들의 공동 작업 과정 자체가 예술 작품이 되는 거예요. /이은화 미술평론가·위키피디아·베를린 국립박물관
논쟁을 외면하지 않는 미술관

함부르거 반호프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현대미술관으로 자리 잡는 데는 뛰어난 컬렉션의 힘도 컸습니다. 새로운 미술관이 탄생하자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던 백남준, 존 케이지 등 1960년대 이후 비디오 아트와 동시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이 이곳으로 이사해 왔어요. 또 기업가였던 에리히 마르크스는 앤디 워홀 등 자신이 평생 모은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을 무상으로 미술관에 장기 임대했어요. 관객들에게 사랑받는 앤디 워홀의 대형 '마오(Mao)' 초상화도 이때 미술관에 오게 된 작품이랍니다.

2004년에는 변호사이자 저명한 미술품 수집가인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플리크가 1500점이 넘는 현대미술 컬렉션을 장기 대여하면서 미술관의 규모와 위상이 한층 커졌습니다. 대여 계약은 2021년 끝났지만 그는 2008년 166점, 2014년 102점 등 모두 268점을 기증했어요. 그러나 여기엔 불편한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플리크 가문이 나치 시기 군수 산업과 강제 노동으로 재산을 축적했다는 점 때문에 그의 컬렉션이 처음 공개됐을 때 독일 사회에서 거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예술과 과거의 책임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됐고, 미술관 역시 이 주제로 토론의 장을 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 역시 함부르거 반호프다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아름다운 것만 골라 기억하는 대신 불편한 역사까지 함께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공간으로 만든 것이니까요.

예술가들의 실험실이 되다

함부르거 반호프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거대한 중앙의 역사 홀입니다. 한때 철도와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던 이 거대한 공간은 이제 현대 미술가들에게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는 실험실이 됐습니다.

1996년 미술가 리처드 롱을 비롯해 2011년 토마스 사라세노 등이 이곳에서 파격적인 설치 미술을 선보였고, 2020년 독일 작가 카타리나 그로세는 붓 대신 대형 분사 장비를 사용해 건물 외부 벽 등에 그림을 그린 거예요. 그림이 캔버스 안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작품이었지요.

현재 역사 홀에서는 리투아니아 출신 작가 리나 라펠리테의 '우리는 시간으로 세월을 만든다(We Make Years Out of Hours)'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2027년 1월 10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조각과 공연, 음악, 관객 참여가 하나로 섞인 거대한 공동 작업입니다. 바닥에는 10㎝ 크기의 나무 조각이 무려 40만개나 펼쳐져 있습니다. 관람객은 그것을 함께 쌓아 벽과 길, 언덕을 만들었다가 다시 허뭅니다. 완성된 작품 하나를 바라보는 전시가 아니라, 작품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과정 자체가 전시인 셈이지요. 공간은 매일 새로운 풍경으로 다시 태어난답니다.

작품 제목처럼 작은 '시간'이 모여 긴 '세월'이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이 모여 공동체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영원히 남을 거대한 기념물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함께 쌓고, 허물고, 다시 만들며 다른 사람의 움직임과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과정입니다. 작가는 '듣기'가 단순히 가만히 귀 기울이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행동이라고 말해요.

이처럼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함께 공간을 채워가는 과정은 함부르거 반호프가 걸어온 '기억과 재건'의 역사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과 분단이라는 아픈 상처를 지우기보다 온전히 품어 안았기에, 이곳은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독보적인 예술 공간으로 재건될 수 있었어요. 과거 승객을 실어 나르던 옛 기차역은 이제 '오늘의 예술과 혁신적인 생각'을 실어 나르며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로 잇는 세계 문화의 중앙역으로 오늘도 힘차게 달리고 있답니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기획·구성=김민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