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안중근에 총 주고 사격 연습시킨 '연해주 독립운동 대부'
입력 : 2026.08.20 03:30
최재형
안중근 의사는 '이 사람'의 후원으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했습니다.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 하얼빈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 사람은 안중근에게 권총을 구해 줬으며, 이 사람이 제공한 장소에서 안중근은 사격 연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안중근 의거를 후원했던 '연해주의 독립운동 대부(代父)'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은 물론 교육, 사업,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선임됐던 이 사람은 최재형(1860~1920)입니다.
최근 최재형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 사업이 서울에서 잇따라 추진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사단법인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사업회'는 지난 15일 용산에서 최 선생의 흉상 제막식을 열었고, 서울 강동구도 흉상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국 땅에서 동포들을 따뜻하게 품어 '페치카(벽난로)'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최재형 선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최근 최재형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 사업이 서울에서 잇따라 추진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사단법인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사업회'는 지난 15일 용산에서 최 선생의 흉상 제막식을 열었고, 서울 강동구도 흉상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국 땅에서 동포들을 따뜻하게 품어 '페치카(벽난로)'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최재형 선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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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입니다. 독립운동은 물론 교육,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최재형은 두만강 근처인 함경도 경원의 가난한 소작인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일곱 살이었던 1867년 큰 흉년이 닥치자 일가족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땅인 연해주에 정착했죠. 최재형은 형수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열한 살 때 가출했다가 해변에 쓰러졌는데 지나가던 러시아 상선에 구조됐습니다.
이로부터 6년 동안 최재형은 선장 부부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선장의 아내는 학식이 뛰어났는데, 그에게서 러시아어와 서양 학문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익혔습니다. 열일곱 살에 다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최재형은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군수업자로 성공했습니다. 러시아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큰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최재형은 그 부(富)를 올바른 일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어가 유창했던 그는 조선 출신 노동자들이 받던 부당한 대우를 시정하는 데 앞장섰고, 동포들을 직원으로 고용했습니다. 조선인의 경제적 자립을 도왔던 것이죠. 교육에도 힘을 쏟아, 한인 마을에 러시아 정교회 계열 학교를 32개나 세웠습니다. 1907년에 이르면 러시아 연추(크라스키노) 일대의 조선인 마을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을 정도로 동포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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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 의거 당시 사용한 것과 같은 종류의 권총입니다.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에게 권총을 구해주고, 사격 연습 장소도 제공했다고 해요.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것을 본 최재형은 연해주를 기점으로 항일 운동에 투신하게 됩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뒤 군인과 의병이 연해주로 모이자, 그들의 총기 구입을 지원했습니다. 1908년엔 당시 국외 최대 독립운동 단체였던 동의회를 세우고 총장이 됐습니다. 군자금을 지원하고 800여 명이 숙식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동의회는 대한제국의 북변간도관리사를 지낸 이범윤이 총대장, 안중근이 참모중장을 맡은 대한의군을 창설해 국경 지대의 일본군을 공격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해 최재형의 활동을 방해했습니다.
최재형은 한글 신문인 대동공보를 발간해 격렬한 논조로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동포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했습니다. 안중근도 한때 대동공보에서 활동했죠. 1909년 최재형은 대동공보 사무실에서 이토 처단 계획을 논의하고 벨기에제(製) 브라우닝 권총과 핵심 이동 정보를 제공하는 등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전폭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안중근이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받도록 변호사까지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안중근이 일본 법정으로 끌려가 이 계획이 실패하자, 최재형은 자책하며 안중근 가족을 보살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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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기념관입니다. 3·1 운동 100주년이었던 지난 2019년, 최재형 선생의 옛집을 기념관으로 새로 꾸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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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최재형 선생과 배우자 최엘레나 여사의 합동 안장식이 열렸습니다. 정부는 최재형 선생의 순국 장소로 추정되는 야산의 흙을 가져와 유해 대신 모셨습니다. /조선일보 DB·보훈문화종합포털·사단법인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사업회·뉴스1
경술국치 다음 해인 1911년 항일 운동 세력은 연해주에 다시 집결했습니다. 여기서 광복군을 양성하는 등 초기 독립운동을 이끈 '권업회'가 창설됐는데 최재형이 회장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러시아의 탄압으로 1914년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 러시아는 공산 혁명을 수호하려는 '적군'과 이에 반대하는 연합 세력인 '백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연해주에 살던 최재형도 여러 차례 거처를 옮겨 다녀야 할 정도로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운동을 주도했고, 대한국민의회가 설립되자 외교부장으로 선출됐습니다. 같은 해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를 재무총장으로 선임했죠.
1920년 최재형은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러시아 내전 참전을 구실로 연해주에 주둔한 상황이었는데, 돌연 한인 마을을 공격해 학살하는 '4월 참변'을 일으켰습니다. 연해주의 항일 세력을 제거하려는 목적이었죠.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최재형에게 급히 피신을 권했으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피하면 일본군이 죄 없는 동포들을 해칠 것이니, 차라리 내가 잡혀 죽는 것이 낫다." 최재형을 체포한 지 이틀 뒤인 4월 7일, 일본군은 한 야산에서 비밀리에 그를 총살했습니다.
최재형에게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죽은 이에게 훈장 등을 줌)됐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과 목숨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전히 바친 독립운동가' '삶 전체가 독립운동의 역사'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처형당한 최재형의 유해는 찾을 수가 없었는데, 2023년 대한민국 정부는 순국(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 장소로 추정되는 우수리스크 야산의 흙을 국내로 가져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가묘 형태로 안장했습니다. 아내 최엘레나 여사와 합장된 것으로, 순국 103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우수리스크에 있는 옛 최재형의 집은 우리 정부가 '최재형 기념관'을 조성해 2019년 개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