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자연재해, 독재 무너뜨리고 한 국가를 둘로 나눴죠

입력 : 2026.08.19 03:30

재난으로 휘청인 정권

지구촌이 기록적인 폭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유럽 곳곳에서 기존 기록을 넘어서는 고온 현상이 나타났고, 중국 동북부에서는 평소 여름에도 비교적 선선한 다롄의 기온이 37도까지 치솟았죠. 우리나라에서도 40도를 넘는 폭염이 나타났어요.

폭염은 열사병을 일으킬 뿐 아니라 심혈관·호흡기 질환을 악화시키고 각종 사고의 위험까지 높이죠. 그런데 기후 위기의 영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아요. 심지어 자연재해는 때로 한 나라의 정치와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기도 했답니다.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같이 살펴볼까요?

폭염, 시위로 번져

튀니지는 최근 살인적인 폭염에 시달리고 있어요. 일부 지역의 기온이 49도까지 치솟으면서 에어컨 사용이 급증했고, 노후화된 전력망은 한계에 도달했어요. 6시간 이상 전기가 끊기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시민들의 불만이 커졌습니다.

폭염은 단순히 불편함을 넘어 생존의 문제가 됐어요. 일부 지역에서는 물 공급마저 차질을 빚으며 주민들은 더 큰 어려움에 처했어요. 결국 튀니지 곳곳에서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에게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수도 튀니스에서는 수천 명이 참가한 집회가 열렸어요. 시위대는 "전기도 물도 없고, 감옥과 물가 상승만 있다"며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어요. 기록적인 폭염이라는 자연현상이 기존 경제난과 정치적 불만을 더욱 증폭시킨 거예요.

앞서 2010년 튀니지에선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열렸고 독재정권은 무너졌지만,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은 이어졌어요.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은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을 척결하겠다는 명분으로 2021년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어요. 의회의 기능을 중단시키고 이후 개헌을 통해 대통령에게 국가 권력을 집중시켰어요. 하지만 경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최근 청년 실업률이 37%를 웃돌고 식료품 가격까지 상승했어요. 시민 불만은 커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록적인 폭염, 정전, 단수까지 겹치자 기존 불만이 거리의 시위로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죠.

지난달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 시민들이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어요. 기록적인 폭염으로 정전, 단수 사태가 발생하자 시민의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지난달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 시민들이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어요. 기록적인 폭염으로 정전, 단수 사태가 발생하자 시민의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1972년 큰 지진이 발생한 니카라과 한 지역을 군인이 순찰하고 있습니다.
1972년 큰 지진이 발생한 니카라과 한 지역을 군인이 순찰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옛 서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옛 동파키스탄) 위치를 표시한 지도. 인도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원래는 한 나라였어요.
파키스탄(옛 서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옛 동파키스탄) 위치를 표시한 지도. 인도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원래는 한 나라였어요.
1970년 동파키스탄을 강타한 사이클론 '볼라'의 위성사진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사망한 가운데 정부의 구호 작업은 더뎠고,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은 커졌습니다. /AFP 연합뉴스·위키미디어 커먼스
1970년 동파키스탄을 강타한 사이클론 '볼라'의 위성사진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사망한 가운데 정부의 구호 작업은 더뎠고,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은 커졌습니다. /AFP 연합뉴스·위키미디어 커먼스
지진으로 무너진 독재정권

1979년 중앙아메리카의 니카라과에서는 혁명으로 40년 넘게 이어졌던 소모사 가문의 독재가 무너졌어요. 소모사 가문은 1930년대부터 니카라과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했어요. 군과 경찰을 이용해 반대 세력을 탄압했고, 농업·산업·무역 등 국가 경제의 핵심 분야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어요. 그러다 농산물 가격이 하락하면서 상황이 어려워졌어요. 실업률은 상승했고, 빈민도 늘어났어요.

그리고 결정적인 재난이 찾아왔어요. 1972년 수도 마나과 인근에서 규모 6.3의 지진이 발생한 겁니다.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어요. 주민의 약 3분의 2가 집을 잃었어요. 수도와 전력망이 심각하게 파손됐고, 식량 부족, 질병이 이어졌어요.

미국과 멕시코 등 여러 국가는 막대한 구호 물자와 자금을 보냈어요. 그런데 이때 소모사 정권의 부패가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소모사와 측근들이 구호 물자를 제대로 시민에게 분배하지 않고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된 거예요. 하층민뿐 아니라 중산층과 기업인 등으로까지 반정부 여론이 확산했어요. 결국 1979년 혁명군이 수도 마나과를 점령하면서 소모사 정권은 무너졌어요.

재난으로 커진 독립 움직임

자연재해 영향으로 지역 간 갈등이 심해져 한 국가가 두 국가로 갈라지게 된 사례도 있어요. 바로 1970년 동파키스탄을 강타한 사이클론(태풍과 성질이 같은 열대성 저기압) '볼라' 때문이었답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하는 과정에서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와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파키스탄으로 분할된 상태였지요. 그런데 당시 파키스탄의 영토는 매우 특이했어요. 인도를 가운데 두고 서쪽의 서파키스탄과 동쪽의 동파키스탄이 수천㎞ 떨어져 있었어요. 두 지역은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언어, 민족, 문화 등은 상당히 달랐어요. 정치권력과 군부의 요직은 서파키스탄 출신이 독점했어요. 경제적 차별에 대한 불만도 컸는데요. 당시 파키스탄의 주요 수출품 가운데 하나인 황마가 동파키스탄에서 대량 생산됐지만 여기서 벌어들인 외화 상당 부분이 서파키스탄에서 사용됐어요.

그러다 1970년 사이클론 '볼라'가 동파키스탄 해안을 강타했어요. 최대 시속 약 185㎞의 강풍과 거대한 폭풍 해일이 덮쳤어요. 당시 재난 경보 체제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많은 주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망자는 30만~50만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돼요.

인도와 국제사회는 대규모 원조에 나섰지만 피해 지역까지 구호품을 운송하는 작업은 매우 더디게 진행됐어요. 정부도 스스로 구호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미 불만을 가지고 있던 동파키스탄 주민들에게 재난 대응의 실패는 '정부는 우리의 생명조차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확산시켰어요. 한 달 뒤 열린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아와미 연맹은 동파키스탄에 배정된 162석 가운데 160석을 차지하며 압승했고, 전체 의회에서도 과반 의석을 확보했어요. 정상적인 민주주의라면 아와미 연맹이 중앙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서파키스탄의 정치·군부 지도층은 권력을 넘기지 않았고, 동파키스탄 정치인과 지식인, 시민을 대대적으로 탄압했어요. 이에 동파키스탄 주민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시작됐어요. 인도까지 전쟁에 개입했고, 결국 파키스탄군이 패배하면서 약 7000만명이 살던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라는 새로운 국가로 독립했습니다.

거대한 재난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해도 정부가 국민을 얼마나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호하느냐에 따라 그 이후의 역사는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이죠. 
정세정 옥길새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민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