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50년전 북한군 도끼에 유엔군 사망… 전쟁 직전까지 갔죠
입력 : 2026.08.13 03:30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오는 18일은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50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판문점은 유엔군과 북한군의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이 있는 곳이고, 만행(蠻行)이란 '야만스러운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도대체 '도끼'라는 말은 왜 들어간 걸까요? 세계는 이 사건을 통해 북한의 폭력적이고 잔인한 실체를 알게 됐습니다.
월남 패망과 헨더슨 소령 사건
1975년 4월 30일은 '월남 패망일'로 기억됩니다. 베트남은 공산 진영의 북베트남(월맹)과 자유 진영의 남베트남(월남)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였는데, 이날 북베트남군의 공세로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고 전쟁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이 적화통일된 것이죠. 같은 분단 국가로서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기도 했던 한국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반면 북한은 자신감을 얻어 제2의 6·25전쟁을 일으킬 목적으로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6월 30일, 판문점에서 '헨더슨 소령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유엔군 소속 미 육군 소령 W.D. 헨더슨을 북한 기자가 별 이유 없이 폭행했고, 싸움이 벌어지자 북한군 여러 명이 헨더슨 소령을 무자비하게 집단 구타한 사건이었어요. 중태에 빠진 헨더슨은 본국으로 후송돼 목숨을 건졌습니다. 베트남전 종전 직후 북한군은 이처럼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1년여 뒤에 일어날 더 큰 사건의 전조(前兆)였던 셈이었어요. 바로 8·18 도끼 만행 사건이었습니다.
월남 패망과 헨더슨 소령 사건
1975년 4월 30일은 '월남 패망일'로 기억됩니다. 베트남은 공산 진영의 북베트남(월맹)과 자유 진영의 남베트남(월남)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였는데, 이날 북베트남군의 공세로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고 전쟁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이 적화통일된 것이죠. 같은 분단 국가로서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기도 했던 한국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반면 북한은 자신감을 얻어 제2의 6·25전쟁을 일으킬 목적으로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6월 30일, 판문점에서 '헨더슨 소령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유엔군 소속 미 육군 소령 W.D. 헨더슨을 북한 기자가 별 이유 없이 폭행했고, 싸움이 벌어지자 북한군 여러 명이 헨더슨 소령을 무자비하게 집단 구타한 사건이었어요. 중태에 빠진 헨더슨은 본국으로 후송돼 목숨을 건졌습니다. 베트남전 종전 직후 북한군은 이처럼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1년여 뒤에 일어날 더 큰 사건의 전조(前兆)였던 셈이었어요. 바로 8·18 도끼 만행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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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발생한 도끼 만행 사건 당시 현장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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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건이 발생한 공동경비구역(JSA) 내 미루나무 위치를 표시한 지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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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군의 공격으로 사망한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배럿 중위의 관이 차량에 실리고 있어요. 이후 이들은 각각 소령, 대위로 1계급 추서(죽은 뒤 관등을 올림)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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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끼 만행 사건 후 한국 시민들이 북한의 행위를 규탄하는 궐기 대회를 열었어요. /조선일보 DB·위키피디아·문화체육관광부
당시만 해도 판문점 JSA는 국군과 유엔군, 북한군이 함께 경비를 서는 곳이었고 따로 경계선이 없었습니다. 국군과 북한군이 마주치면 대화를 나눴고 '통일이 되면 서로 집에 놀러 가자'며 주소를 교환하기도 했었어요. 1976년 8월 18일 전까지는 말이죠.
판문점 서남쪽 '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처에 있던 유엔군 제3초소는 북한군 초소 3개에 둘러싸인 곳이었습니다. 가운데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여름이면 무성해져 시야를 방해해 북한군이 도발을 하더라도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죠. 1976년 8월 6일 유엔군은 미루나무를 자르려고 했는데 북한군이 나타나 작업을 중단시켰습니다. 유엔군은 이 나무를 가지치기만 하는 것으로 결정했어요.
8월 18일 오전 10시 30분, 유엔군 경비대는 가지치기 작업을 할 한국인 노무자 5명, 이들을 감독·경호할 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 소대장 마크 배럿 중위 등 유엔군 장교 2명과 병사 4명, 한국군 5명 등 군인 11명을 미루나무로 보냈습니다. 보니파스 대위는 사흘 뒤면 한국을 떠날 예정이었지만 이 골칫거리 미루나무 문제를 후임에게 넘기지 않으려 했대요. 북한군 10명이 나타나 "뭐 하는 거냐"고 항의했지만 가지치기라는 말에 수긍했고, 이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0시 50분쯤 북한군 장교 2명과 병사 15명이 현장에 나타나면서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북한 장교 중 한 명은 난폭하기로 소문나 '불도그'란 별명으로 불린 박철(본명 홍성문) 중위였어요. 헨더슨 소령 사건의 주동자 중 한 명이었죠. 그가 외쳤습니다. "작업 중단! 중단하라우!"
보니파스 대위는 그 말을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11시 무렵, 북한군 20여 명을 태운 트럭이 미루나무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박철은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래도 작업이 계속되자 손목시계를 풀어 신호를 보내더니 "죽여!"라고 외쳤습니다.
북한군은 트럭에서 쇠몽둥이와 삽을 꺼내 들었고, 한국인 노무자들이 쓰던 도끼를 집어 들었습니다. 5명이 달려들어 보니파스 대위에게 도끼를 마구 휘둘러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구타당한 배럿 중위는 이송 중 사망했고, 다른 유엔군, 국군 장병들도 부상 당했습니다.
'폴 버니언 작전'과 김일성의 사과
북한 측은 "미군이 도끼를 먼저 던졌고, 우리가 날아오는 도끼를 붙잡아 다시 던졌다"는 황당한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촬영한 당시 현장 사진만 봐도 북한군의 일방적 도발이었음이 너무나 명백했습니다. 소련과 중국, 다른 공산 국가들도 이 사건만큼은 좀처럼 북한 편을 들지 않았습니다.
유엔군은 6·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준(準)전시 상태에 해당하는 '데프콘3'를 발령했습니다.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응징 조치로 '폴 버니언 작전'을 명령했습니다. 북미 설화 속 거인 나무꾼의 이름을 딴 것이었죠.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는 군사 작전이었습니다. 한미 지상 병력 140명이 투입돼 벌목 작업을 경비했고, F-4 전투기, F-111, B-52 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을 날거나 출격 대기했습니다. 또 동해상엔 전투기 65대를 실은 미드웨이 항공모함이 출동했습니다. 8월 21일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나무 한 그루 베는 일을 엄호하기 위해 항공모함과 핵폭탄 적재가 가능한 전폭기가 출격했다는 사실은 북한에 대한 경고이면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유엔군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의지의 상징이기도 했죠.
한국 정부 역시 이것을 '미국과 북한의 갈등'으로 여기고 손 놓고 있지는 않았어요. 북한의 전쟁 도발로 인식했던 것이죠. 박정희 대통령은 8·18 사건을 보고받고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당장 내 철모와 군화를 가져와라.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다." 특전사 대원 64명으로 구성된 국군 결사대가 JSA 내 북한군 초소 4개를 파괴하는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북한군은 도주했습니다.
마침내 북한은 고개를 숙였습니다. 폴 버니언 작전 이후 미국 측에 비공개로 김일성의 사과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이죠. 8·18 사건은 이후 JSA 내에서도 군사분계선을 긋게 했고, 대한민국 국민의 반공 태세를 한층 높였습니다. 북한의 실체가 무엇인지, 한·미 동맹의 가치가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북한은 여전히 그 사건이 '미제(美帝)의 도발'이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들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