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3000㎞ 떨어진 우간다에 네타냐후(이스라엘 총리) 형 동상 세운 이유는?
입력 : 2026.08.12 03:30
엔테베 작전
최근 아프리카 국가 우간다의 엔테베 국제공항에 한 이스라엘 군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주인공은 요나탄 네타냐후(1946~1976) 중령입니다. 이스라엘 총리인 베냐민 네타냐후(77)의 친형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비행기로 3000㎞ 넘게 떨어진 우간다에 왜 그의 동상이 세워진 걸까요? 우간다는 왜 '요나탄 네타냐후의 용기와 희생을 기린다'고 말하는 걸까요?
'검은 히틀러' 이디 아민
1917년,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재건하는 걸 지원하겠다는 영국의 '밸푸어 선언' 후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늘어났어요. 주변 아랍 국가들은 이에 반발했지요.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 선언을 하자 중동 지역에서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비아랍 국가들과 협력 관계를 넓히려 했습니다. 1957년 이스라엘은 가나의 독립을 인정했고 1958년에는 신흥 독립 아프리카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스라엘 국제협력단'을 설립했습니다.
1962년 우간다는 오랫동안 영국 지배를 받다가 독립했는데요. 이스라엘은 우간다가 독립하자마자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자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간다에 농업·의료·수자원 전문가를 파견했고, 도로와 공항 건설에도 참여했어요. 군사 고문을 파견해 우간다 군인 훈련을 도왔고, 우간다 학생들은 이스라엘에서 공부했습니다. 두 나라 관계는 가까웠어요.
그러나 1971년 육군 장교 출신인 이디 아민(1925~2003)이 군사 쿠데타로 우간다 정권을 장악하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아민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 적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고, 집권 초기에는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았어요. 하지만 이스라엘이 아민의 추가 전투기 제공과 군사 지원 요청을 거절하자 관계가 악화했습니다. 아민은 리비아 최고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1942~2011)에게 경제·군사 지원을 받으면서 친아랍 노선으로 돌아섰습니다. 이스라엘인과 군사 고문들을 추방하고 외교 관계도 끊어 버렸지요. 아민은 이후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선언하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그의 집권 기간(1971~1979)에 정치적 숙청과 인종 박해로 희생된 사람이 수십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검은 히틀러'로 불렸습니다.
'검은 히틀러' 이디 아민
1917년,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재건하는 걸 지원하겠다는 영국의 '밸푸어 선언' 후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늘어났어요. 주변 아랍 국가들은 이에 반발했지요.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 선언을 하자 중동 지역에서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비아랍 국가들과 협력 관계를 넓히려 했습니다. 1957년 이스라엘은 가나의 독립을 인정했고 1958년에는 신흥 독립 아프리카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스라엘 국제협력단'을 설립했습니다.
1962년 우간다는 오랫동안 영국 지배를 받다가 독립했는데요. 이스라엘은 우간다가 독립하자마자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자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간다에 농업·의료·수자원 전문가를 파견했고, 도로와 공항 건설에도 참여했어요. 군사 고문을 파견해 우간다 군인 훈련을 도왔고, 우간다 학생들은 이스라엘에서 공부했습니다. 두 나라 관계는 가까웠어요.
그러나 1971년 육군 장교 출신인 이디 아민(1925~2003)이 군사 쿠데타로 우간다 정권을 장악하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아민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 적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고, 집권 초기에는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았어요. 하지만 이스라엘이 아민의 추가 전투기 제공과 군사 지원 요청을 거절하자 관계가 악화했습니다. 아민은 리비아 최고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1942~2011)에게 경제·군사 지원을 받으면서 친아랍 노선으로 돌아섰습니다. 이스라엘인과 군사 고문들을 추방하고 외교 관계도 끊어 버렸지요. 아민은 이후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선언하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그의 집권 기간(1971~1979)에 정치적 숙청과 인종 박해로 희생된 사람이 수십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검은 히틀러'로 불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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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우간다의 엔테베 국제공항에 세워진 요나탄 네타냐후 중령의 동상입니다.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의 친형인 그는 50년 전 엔테베 공항에서 인질을 구출하다 전사했습니다. 작은 사진은 그의 생전 모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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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과 우간다를 표시한 지도. 서로 3000㎞ 넘게 떨어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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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년 엔테베 작전으로 구출된 승객들이 이스라엘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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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 특공대가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엔테베 공항으로 갈 때 싣고 가서 직접 탔던 검은색 승용차예요. /AP 연합뉴스·위키피디아
1976년 6월 27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출발해 프랑스 파리로 향하던 비행기가 경유지 그리스 아테네에서 이륙한 직후 공중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비행기에는 다양한 국적의 승객 250여 명이 타고 있었는데요. 3분의 1 이상이 이스라엘인이었습니다. 납치범은 공산주의 성향의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소속으로, 비행기를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으로 끌고 갔어요. 요구 사항은 이스라엘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투옥된 아랍 무장대원 53명의 석방이었습니다.
당시 아민은 겉으로는 자신이 인질 석방을 중재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아민의 지휘 아래 우간다 군인들은 공항을 경비하며 납치범들을 보호했습니다. 납치범들은 비이스라엘계 승객 상당수를 풀어줬어요. 최종적으로 승객과 승무원 106명이 공항에 억류됐습니다.
요나탄 작전
이스라엘은 협상하는 것처럼 시간을 벌면서 극비리에 구출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석방된 승객들의 증언을 통해 인질과 납치범의 위치도 확인했어요. 그리고 7월 3일 밤 이스라엘군 특공대와 지원 병력 약 100명이 엔테베 공항에 도착했어요. 특공대는 아민 대통령의 차량 행렬로 위장하기 위해 검은색 승용차까지 수송기에 실어 갔습니다. 특공대는 곧바로 터미널로 돌진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한순간도 허비하지 않고 납치범 전원을 사살했습니다. 인질 102명은 구출됐지만, 교전 과정에서 인질 3명이 숨지고 1명은 병원에서 피살됐습니다. 우간다군 수십 명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스라엘군에서 발생한 유일한 전사자는 특공대 지휘관 요나탄 네타냐후 중령이었습니다. 특공대는 구출한 인질들과 네타냐후 중령의 시신을 싣고 떠났습니다. 엔테베 공항 도착부터 이륙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58분이었습니다. '20세기 최대의 인질 구출 작전'으로 통하는 엔테베 작전은 요나탄 네타냐후 중령을 기리기 위해 '요나탄 작전'으로 불리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우간다 입장에선 이스라엘군이 사전 동의 없이 영토에 침입하고 우간다 군인들을 사살한 사건이었어요. 이스라엘과 우간다의 적대 관계는 한동안 계속됐습니다.
그러나 독재자 아민은 1979년 축출됐고, 우간다에서는 여러 차례의 정권 교체와 내전을 거쳐 1986년 요웨리 무세베니(82)가 집권했습니다. 무세베니 정부는 실용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했기에 1994년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농업·기술·무역·군사 훈련 분야에서 협력했어요. 2016년에는 베냐민 네타냐후가 엔테베 작전 40주년을 맞아 우간다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형이 숨진 옛 공항 터미널에서 추모식을 열고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 확대를 선언했어요. 그리고 이번에 동상까지 세워진 것입니다. 동상 건립을 주도한 이는 무세베니의 장남으로, 그는 "요나탄 네타냐후 중령의 리더십과 희생은 용기와 의무의 영원한 상징이 됐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형의 죽음은 동생 인생에도 큰 영향을 줬습니다. 당시 베냐민 네타냐후는 미국 유학 중이었고, 정치인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엔테베 작전 이후, 베냐민 네타냐후는 형을 기리는 '요나탄 대테러 연구소'를 설립하고 국제 테러리즘을 주제로 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정치인·군인·학자들과 만났고, 외교관, 우파 정당 국회의원을 거쳐 1996년 이스라엘 총리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