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더위와 사투 벌인 조선 임금들… 얼음 에어컨 만든 왕은?

입력 : 2026.08.06 03:30

피서

연일 계속되는 폭염 때문에 거리에는 외출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온열 질환자는 늘어나고 있어요. 지금이야 실내에서 시원한 에어컨을 쐬고 냉장고에서 찬 음료를 꺼내 마시며 더위를 잊을 수 있다지만, 그런 것들이 없던 옛날에는 도대체 이런 찜통더위를 어떻게 견뎠을까요? 지난주 살핀 빙고(氷庫·얼음 창고)에 이어, 우리 조상들의 더위 대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국보인 천전리 암각화(울산 울주군) 일대입니다. 산이 있고 물이 흘러 신라 왕족이 피서지로 찾았대요.
국보인 천전리 암각화(울산 울주군) 일대입니다. 산이 있고 물이 흘러 신라 왕족이 피서지로 찾았대요.
신라와 고려에서도 피서를 떠났다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으로 옮기는 것을 피서(避暑)라고 해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대의 암각화(바위 면에 새긴 그림)로 국보로 지정된 울산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를 들 수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 역시 국보인 천전리 암각화가 있어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계곡물이 흘러 피서지로 찾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525년(신라 법흥왕 12년) 왕의 동생인 김입종 일행이 이곳을 찾아 암각화가 있는 바위에 글씨를 남겼습니다. 더위를 피하려 경주에서 울산까지 근거리 여행을 떠났던 셈이죠.

고려 시대엔 초복·중복·말복을 의미하는 음력 6~7월의 삼복(三伏) 때가 되면 관리들에게 휴가 3일을 줬고, 이 기간에는 건물 등을 짓는 공사를 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25대 임금인 충렬왕은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을 잠시 떠나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피서를 가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어요. 북쪽에 있는 서경이 개경보다 서늘했기 때문이죠. 신하를 미리 보내 임금이 머물 만한 쾌적한 장소를 사전 답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불볕더위 속 노역자와 죄수 배려

극심한 더위 때문에 국가의 중요한 사업이 어그러질까 걱정한 조선 임금이 있었습니다. 바로 22대 정조(재위 1776~1800)였어요. 1794년 6월 28일의 '정조실록' 기록을 보면 임금은 당시의 불볕더위를 염열(炎熱)이라 표현했는데 그야말로 '타는 듯한 더위'였단 얘기죠.

이때 정조는 왕권 구축, 상업 진흥, 군사력 강화 등의 목적으로 수원 화성을 축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축성 작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이 끙끙대고 헐떡거리는 모습을 떠올리며 "생각만 한다고 해서 속 타고 더위 먹은 자의 열을 식혀 주는 데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라고 탄식합니다. 조선 왕조가 폭염을 단순한 날씨의 변화가 아니라 생산력을 떨어뜨리는 국가적 재난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조가 취한 정책에서 애민(愛民·백성을 사랑함) 정신이 보인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척서단(滌暑丹), 즉 '더위를 씻어내는 환약' 4000정을 짓게 해 공사 현장에서 나눠 주도록 지시했던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온열 질환 예방 및 치료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온열 질환의 위험을 알고 있던 조선 왕조에선 찜통 같은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폭염으로 목숨을 잃을까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태종과 성종 때는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죄수들을 한여름에 풀어주거나 불구속 상태로 수사하게 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경복궁 경회루입니다. 조선 왕들은 아무리 더워도 좀처럼 궁궐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는데, 대신 경회루나 창덕궁 후원에서 더위를 피했다고 해요.
경복궁 경회루입니다. 조선 왕들은 아무리 더워도 좀처럼 궁궐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는데, 대신 경회루나 창덕궁 후원에서 더위를 피했다고 해요.
우리나라 전통 청량음료인 제호탕입니다. 조선 임금들이 여름철 더위를 쫓기 위해 마셨습니다.
우리나라 전통 청량음료인 제호탕입니다. 조선 임금들이 여름철 더위를 쫓기 위해 마셨습니다.
얼음 에어컨 만든 연산군

그럼 조선 시대 왕들은 어떻게 더위를 피했을까요? 아무리 더워도 좀처럼 궁궐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연못이 있는 경복궁의 경회루나 계곡으로 둘러싸인 창덕궁 후원처럼 궁궐 안에서 그나마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고 해요. 부채를 부치며 수박과 참외를 먹으며 더위를 견뎠답니다.

여름 피서용으로 호화로운 궁전이나 별장을 지었던 중국·러시아의 군주와는 달리 조선 임금들은 지나친 사치를 자제했던 겁니다. 궁중에선 여름에 오매(덜 익은 푸른 매실을 짚불 연기에 쬐어 말린 것), 꿀, 한약재를 끓여 차갑게 식힌 '제호탕'을 마셨다고 합니다.

9대 성종은 밥을 찬물에 말아 먹었고, 21대 영조는 보리로 만든 미숫가루를 여름 건강식으로 마셨다고 해요. 영조의 손자인 정조는 "더위를 피해 자꾸 서늘한 곳만 찾아다니다 보면 만족할 때가 없을 것"이라며 그냥 참고 독서에 몰두해 더위를 잊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치와 폭정으로 유명했고 신하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임금, 10대 연산군은 달랐습니다. 여름에 잔치가 열렸을 때 1000근(약 600㎏)이나 나가는 대형 놋쇠 쟁반 4개를 만들고 그 위에 얼음을 가득 깔아 동서남북에 하나씩 뒀대요. 조선 시대의 에어컨이었던 셈입니다. 대나무로 만든 원통형 틀 안에 냉혈 파충류인 뱀을 집어넣고 그 위에 앉거나 기대는 방식으로 더위를 식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조선 화가 이경윤의 ‘고사탁족도’입니다. 조선 사람들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으로 더위를 식혔대요. /울산광역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화가 이경윤의 ‘고사탁족도’입니다. 조선 사람들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으로 더위를 식혔대요. /울산광역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국립중앙박물관
계곡물에서 '탁족' 즐겨

그럼 대다수 백성은 어떻게 더위를 이겨냈을까요? 부채질을 하고, 통풍이 잘되는 모시옷을 입고, 나무 그늘이나 정자에서 쉬는가 하면, 잠잘 땐 대나무로 만든 죽부인을 이용해 더위를 견뎠습니다. 농사일은 낮을 피해 새벽과 해 질 무렵에 집중해서 했습니다.

시원한 계곡을 찾아 더위를 식히기도 했지만 양반들은 체면상 물에 풍덩 뛰어들기 어려웠고, 대신 탁족(濯足)을 즐겼습니다. 차고 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가 온몸이 시원해지도록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한양에 사는 양반들은 당일치기 여행으로 북한산 같은 근교 계곡에 다녀오는 '탁족 모임'을 만들기도 했답니다.

해변에 살았던 사람들은 바다에 풍덩 뛰어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해수욕을 하는 풍습이 없었어요. 오랜 세월 바다는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고기를 잡고 소금을 거두는 노동의 공간이었고, 동시에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공포의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럽에서도 18세기가 돼서야 해수욕이 대중화됐다고 해요. 1913년 일본인에 의해 부산 송도해수욕장이 문을 열었고, 인천 월미도와 원산 송도원 등에 해수욕장이 생기면서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해수욕 문화가 생겨났습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기획·구성=김민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