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명화 돋보기] 여름 과일에 담긴 풍요, 저항, 그리고 인생 예찬

입력 : 2026.08.03 03:30

그림 속 수박

여름 더위가 절정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과일은 아마 수박일 거예요. 수박은 과육의 92% 정도가 수분이어서 땀으로 잃어버린 수분을 보충하기에 좋지요. 짙은 초록색 껍질을 가르면 붉은 과육과 검은 씨가 나타나는 수박은 겉과 속의 색이 극적으로 대비돼 많은 화가가 그린 과일입니다. 물론 수박을 그린 방식과 의미는 화가마다 다릅니다. 수박의 커다랗고 둥근 모양에 주목한 화가도 있고, 빨갛게 잘 익은 속살을 그리면서 여름날의 즐거움이라든가 땀 흘린 인생의 성취를 표현한 화가도 있어요. 나아가 수박을 통해 사회적 문제에 저항한 이들도 있었답니다. 오늘은 그림 속 수박을 보면서 다양한 의미를 살펴보기로 해요.

신사임당의 '수박과 들쥐'. 수박 세 통과 들쥐, 나비가 보입니다.
신사임당의 '수박과 들쥐'. 수박 세 통과 들쥐, 나비가 보입니다.
풍요의 상징

조선시대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널리 알려진 신사임당(1504~1551)은 '수박과 들쥐'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예로부터 인생은 계절로 비유되곤 했는데, 봄은 풋풋한 청소년 시기를, 여름은 한창 일할 젊은 시기를, 가을은 지혜로운 중년의 삶을, 겨울은 평화로워지는 늙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수박과 들쥐'는 인생의 여름을 보여주고 있어요. 수박 세 통이 넝쿨에 주렁주렁 달려 있네요. 그림에서 열매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면 보통 자손이 많고 적다거나, 결실이 풍부하거나 빈약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수박은 씨가 많고 큼직하여 다산이나 풍요의 의미를 담고 있지요. 그런데 들쥐 두 마리가 얄밉게도 수박의 속을 파먹고 있군요. 세상에는 남이 노력해서 얻은 결실을 노리고 빼앗는 도둑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겠지요. 혹은 들쥐를 통해 수박이 얼마나 달고 싱싱한지 말해주려는 것이라 볼 수도 있어요. 그림으로 수박의 맛을 보여줄 순 없으니까요.

스페인 화가 호아킨 소로야의 '수박을 먹는 소년'입니다. 더위를 피해 수박을 먹는 소년을 그렸어요.
스페인 화가 호아킨 소로야의 '수박을 먹는 소년'입니다. 더위를 피해 수박을 먹는 소년을 그렸어요.
두 번째 그림에서는 들쥐가 아닌 사람이 수박을 먹고 있어요. 스페인 화가 호아킨 소로야(1863~1923)가 1920년에 그린 '수박을 먹는 소년'입니다. 소로야는 바닷가 햇빛 아래 노는 아이들을 환한 색채로 그린 화가로 유명해요. 그런데 이 그림에서 화가는 소년에게 그늘을 선물했어요. 밀짚모자를 쓴 소년은 한낮의 볕을 피해 그늘에서 잠시 쉬며 갈증을 달래는 중입니다. 두 손으로 수박 조각을 들고 먹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모자란지 무릎 위에는 나머지 수박 반 통이 놓여 있습니다. 소년은 더위에 지친 듯 웃지도 않고 수박 먹기에만 열심이에요.

프랑스의 폴 세잔이 그린 '수박과 석류가 있는 정물'.
프랑스의 폴 세잔이 그린 '수박과 석류가 있는 정물'.
쪼개진 수박의 의미

먹음직스러운 수박과는 거리가 먼 수박 그림도 있어요. 바로 프랑스의 폴 세잔(1839~1906)이 그린 '수박과 석류가 있는 정물'입니다. 세잔은 그림 속 과일은 반드시 실제 과일처럼 탐스럽게 보일 필요가 없으며, 그림은 그림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화가였답니다. 그림 왼쪽의 짙은 녹색과 청색, 보라색 물감으로 투명하면서도 겹치게 색칠한 길쭉한 타원형 덩어리가 수박이에요. 커다란 수박은 아직 쪼개지 않은 채 탁자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 옆에는 동그란 석류가 두 개 놓였고, 뒤쪽에는 배가 불룩한 병과 둥근 뚜껑이 있는 그릇이 보여요. 세잔은 수박의 맛을 상상하게 하는 빨간 속살을 그리지 않았죠. 크고 작은 둥근 형태들이 서로 어떤 조화를 이루는지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찰스 포터가 그린 '무제: 갈라진 수박'입니다. 노예 제도에서 벗어난 흑인들 중엔 수박을 재배해 경제적 부를 일군 이들도 있었어요. 포터는 수박을 통해 흑인의 자존감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찰스 포터가 그린 '무제: 갈라진 수박'입니다. 노예 제도에서 벗어난 흑인들 중엔 수박을 재배해 경제적 부를 일군 이들도 있었어요. 포터는 수박을 통해 흑인의 자존감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의 찰스 포터(1847~1923)가 1890년쯤 발표한 '무제: 갈라진 수박'은 수박이 지닌 사회적 의미가 그림의 핵심입니다. 수박이 거칠게 갈라져 있으며, 앞쪽으로는 잘린 조각이 있어요. 어두운 뒤쪽에는 수박 덩굴과 잎이 펼쳐져 있지요. 포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는데, 포터가 살았던 19세기 말 미국에서 수박은 흑인 사회를 떠올리게 하는 과일이었습니다. 흑인은 노예 제도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어쩔 수 없이 백인 사회에 의존해야 했는데, 수박을 재배하고 팔아 경제적 자립을 이루는 자랑스러운 흑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인 사회는 그런 흑인을 탐욕스럽게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포터는 바로 그 시점에 이 갈라진 수박 그림을 내놓았습니다. 비록 수박의 겉은 상처 입었어도 달고 빨갛게 익은 속은 진심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흑인들의 자존감을 말없이 표현하고 있지요.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의 수박 정물화입니다. 수박에 새겨진 'VIVA LA VIDA(삶이여 영원하라)'라는 문구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마지막 인사랍니다. /국립중앙박물관·위키미디어·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프리다 칼로 미술관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의 수박 정물화입니다. 수박에 새겨진 'VIVA LA VIDA(삶이여 영원하라)'라는 문구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마지막 인사랍니다. /국립중앙박물관·위키미디어·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프리다 칼로 미술관
삶이여 영원하라

멕시코 출신의 프리다 칼로(1907~1954)는 자기 생애를 돌아보며 수박 정물화를 그렸습니다. 앞쪽 수박 조각에 'VIVA LA VIDA(삶이여 영원하라)'라는 말이 적혀 있네요. 젊을 적 교통사고로 척추를 다쳐 평생을 고통과 싸워야 했던 칼로는 몸이 극도로 약해진 상태에서 수박 정물화를 그렸어요.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이 문구를 덧붙였어요. 싱싱한 수박 위에 생의 마지막 인사를 남긴 것이지요. 피처럼 붉은 수박은 강인한 생명력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것은 그냥 평온하게 살아온 생이 아니라, 수박처럼 땡볕 더위라는 시련을 견뎌 낸 화가의 치열한 삶이라고 할 수 있죠. 죽음을 앞둔 화가가 마지막으로 남긴 그림과 메시지는 절망이나 원망이 아니라, 생명력과 삶에 대한 찬사였답니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김민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