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2000년 전부터 얼음 창고 지어… 한강 안 얼면 걱정했죠

입력 : 2026.07.30 03:30

얼음

더운 여름철, 얼음에 자꾸 손이 갑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얼음이 가득 담긴 음료를 들고 다닙니다. 지금이야 손쉽게 얼음을 만들 수 있지만,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이 없었던 옛날엔 어떻게 했을까요? 한여름 얼음은 꿈도 못 꿨을까요? 우리가 여름철 얼음을 찾듯, 선조들도 얼음을 즐기기 위해 무척 애썼답니다.

삼국 시대부터 등장한 얼음 창고

선조들은 '빙고(氷庫)'라는 독특한 구조물을 만들었습니다. 한자를 풀어보면 '얼음 창고'인데요. 땅을 깊숙이 파낸 뒤 돌이나 나무로 옆을 둘러 공기와 열이 통하지 않도록 한 특수 창고랍니다. 당시엔 얼음을 만드는 제빙(製氷) 기술이 없었기에, 겨울철 강에서 만들어진 얼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겨울 강의 얼음을 빙고로 가져온 뒤 가마니나 짚 등으로 감싸 열이 최대한 얼음에 가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도 얼음을 꺼내 쓸 수 있었대요.

빙고는 언제 처음 만들어졌을까요? 기록에 따르면 신라 3대 왕인 유리 이사금(재위 24~57년) 때 얼음 창고를 만들었다고 해요. 먼 옛날 삼국 시대부터 선조들은 얼음을 손에 넣으려고 애쓴 거죠. 고려 시대로 접어들면 얼음에 관한 기록이 많이 등장합니다. 여름이 다가오며 왕에게 얼음을 올렸다거나, 반대로 왕이 신하에게 얼음을 나눠줬다는 내용 등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한양에 빙고를 만들었어요. 지금 지명으로도 남아 있는 동빙고·서빙고(서울 용산구)입니다. 동빙고는 왕실의 제사를 위한 얼음을, 서빙고는 궁궐에서 쓰거나 관리와 백성에게 나눠주는 얼음을 보관했습니다. 특히 서빙고는 한때 9개의 빙고가 만들어질 만큼 큰 규모를 자랑했지요.

매년 12월이 되면 한밤중에 얼음을 톱으로 잘라 길이 45㎝, 너비 30㎝, 두께 20㎝의 덩어리로 나누었는데, 이걸 정(丁)이라고 했습니다. 무게가 대략 20㎏ 정도였어요. 매년 20만 정 정도가 빙고에 보관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운 여름이 되면 왕의 친척이나 나이 든 관리들은 빙고에서 얼음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얼음을 칼로 쳐 잘게 부순 뒤 그대로 먹거나, 물에 넣어 먹는 식으로 얼음을 즐겼다고 해요. 백성, 심지어 감옥의 죄수가 얼음을 받기도 했습니다.

1950년쯤 한강에서 얼음을 잘라내는 모습입니다.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겨울 얼음을 채취해 여름까지 사용했습니다.
1950년쯤 한강에서 얼음을 잘라내는 모습입니다.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겨울 얼음을 채취해 여름까지 사용했습니다.
6·25전쟁이 끝난 뒤, 천연빙을 쓰지 말자는 목소리가 점점 커집니다. 사진은 ‘전염병의 온상인 천연빙’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담긴 1961년 1월 27일자 조선일보입니다.
6·25전쟁이 끝난 뒤, 천연빙을 쓰지 말자는 목소리가 점점 커집니다. 사진은 ‘전염병의 온상인 천연빙’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담긴 1961년 1월 27일자 조선일보입니다.
경남 창녕군에 있는 조선시대 석빙고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선일보 DB
경남 창녕군에 있는 조선시대 석빙고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선일보 DB
개인이 만든 '사빙고'의 등장

사람들은 더 많은 얼음을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접 빙고를 만들었어요. 이를 민간이 만든 빙고, '사빙고(私氷庫)'라고 했습니다. 조선시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처음으로 사빙고를 만든 뒤, 노량진·흑석·마포·양화진 등 한강 주변 곳곳에 민간 빙고가 생겨납니다.

조선 후기로 가면 얼음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요. 생선을 싱싱하게 나르는 일종의 냉장선인 '빙어선(氷魚船)'이 등장했기 때문이지요. 그 전에는 물가에서 잡은 물고기를 다른 지역으로 보낼 때 물고기를 말려서 만든 건어물 형태로만 가능했지만, 빙어선의 등장으로 서해에서 잡은 조기·준치·민어 등을 한양 사람들도 신선하게 즐길 수 있게 됐지요. 생선이 썩지 않게 하려면 많은 양의 얼음이 필요했고요. 고기를 공급하던 가게를 뜻하는 '현방'에서도 얼음이 필요했습니다. 수요가 늘어나니 자연스럽게 사빙고 주인은 큰돈을 만지게 됐습니다.

업자들의 욕심으로 사람들이 불편을 겪는 일도 있었어요. 겨울철 얼음을 떠서 곳간에 저장하는 걸 장빙(藏氷)이라고 하는데, 장빙을 전문으로 하는 업자들은 자기들끼리 약속을 하고 얼음값을 비싸게 매겼어요. 결국 얼음 유통에 차질이 생겨 생선과 고기가 썩기도 했답니다.

'빙수광' 방정환

일제강점기에도 얼음의 인기는 계속됩니다. 식재료 신선도 유지용뿐만 아니라 먹는 빙수가 보편화됐기 때문이었죠. 조선 시대 때도 빙수가 있긴 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물에 얼음을 넣어먹는 수준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부터 간 얼음에다 딸기·바나나 시럽 등을 뿌려먹는 빙수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답니다. 오늘날의 팥빙수에 비하면 조촐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즐겼습니다. 빙수집도 이곳저곳에 들어섰지요.

어린이를 사랑해 어린이날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소파 방정환(1899~1931)도 소문난 빙수광이었습니다. 빙수를 예찬하는 글도 썼어요. 간 얼음이 사르르 녹아버리면서 기분이 좋아진다는 내용이에요. 자신이 좋아하는 어린이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을 빙수 앞에서 보인 거였죠. 조금 놀랍게도, 방정환은 날달걀을 깨서 빙수에 넣어 먹기도 했대요. 무슨 맛일지 잘 상상은 안 가지만, 방정환의 말에 따르면 빙수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혀에 올리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부드러운 얼음이라고 하니 무엇이 들어가도 시원했을 겁니다.

쉽게 식지 않은 '한강 얼음' 인기

당시 얼음 시장은 천연빙과 인공 얼음으로 나뉘게 됩니다. 과거의 방식대로 한강에서 떠온 천연빙과, 제빙 기술 발전으로 사람이 만들어낸 인공 얼음이 함께 유통됐지요. 얼핏 천연빙이 급속도로 인기를 잃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답니다. 우선 제빙 회사가 만들어내는 얼음이 그 당시 많지 않았고, 사람들은 강에서 얼음을 잘라 쓰는 게 더 익숙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6·25 전쟁 직전까지도 따뜻한 날씨에 강이 얼지 않아 그 다음해까지 얼음이 부족할까봐 걱정하는 내용의 신문 기사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차츰 인공 얼음의 장점을 알게 됐죠. 흙과 먼지는 물론 해로운 균이 섞여 있을지 모르는 천연빙에 비해 인공 얼음이 더 깨끗하다는 사실을요. 정부는 1950년대 후반 천연빙에서 대장균이 검출된 뒤 천연빙 채취를 금지합니다. 그 이후 제빙기로 얼린 인공 얼음은 더 널리 공급됐습니다.

이젠 한강에서 얼음을 뜨거나 빙고에서 얼음을 받아와야 하는 시대가 끝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얼음 한 조각에 더위를 잊는 마음은 그대로일 겁니다.
이한 작가·'한잔 술에 담긴 조선' 저자 기획·구성=김민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