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전쟁·셋방살이 딛고… 세계 3위 박물관으로 거듭났어요
입력 : 2026.07.23 03:30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국중박)이 지난해 관람객 수 기준으로 세계 3위(약 650만명)에 올랐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보다 더 많은 사람이 국중박을 찾았어요. 올해는 상반기(1~6월)에만 벌써 380만명이 방문한 만큼, 연말까지 7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답니다. 외국인에게도 인기가 높은데, 실제 국중박에 가 보면 외국인 관람객을 많이 볼 수 있어요. 'K컬처'와 한국 유물이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거죠. 오늘은 국중박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역경을 거쳐 온 한국 문화유산만큼이나 무척 파란만장한 역사였습니다.
초대 관장 김재원의 헌신
국중박의 뿌리는 1909년 창경궁에서 문을 연 '제실(帝室)박물관'입니다. 주로 궁중 유물과 황실의 수집품을 소장했던 이곳은 나라가 망한 뒤 '이왕가(李王家)박물관'이 됐답니다. 이곳 말고도 국중박이 소장품을 이어받은 또 다른 박물관이 있는데, 1915년 일제가 경복궁에 만든 '조선총독부 박물관'입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국중박 소장품의 기초가 된 세 번째 박물관은 민속학자 송석하가 초대 관장을 지낸 남산의 국립민족박물관이었습니다.
해방 후 국립박물관은 1945년 12월 3일 경복궁에서 문을 열게 됩니다. 처음엔 예산도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죠. 하지만 '한국 박물관의 초석'으로 불리는 초대 관장 김재원(1909~1990)이 25년 동안 국립박물관의 기틀을 세웠답니다. 김 관장은 일부 미군이 경복궁 안의 유물을 기념품 삼아 몰래 가져간다는 걸 알고, 이를 막기 위해 경복궁 안에 있는 관사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어요. 1946년 5월에는 경주의 호우총과 은령총을 조사 발굴했는데, 호우총에선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적힌 유물이 발굴돼 세상을 놀라게 했죠.
초대 관장 김재원의 헌신
국중박의 뿌리는 1909년 창경궁에서 문을 연 '제실(帝室)박물관'입니다. 주로 궁중 유물과 황실의 수집품을 소장했던 이곳은 나라가 망한 뒤 '이왕가(李王家)박물관'이 됐답니다. 이곳 말고도 국중박이 소장품을 이어받은 또 다른 박물관이 있는데, 1915년 일제가 경복궁에 만든 '조선총독부 박물관'입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국중박 소장품의 기초가 된 세 번째 박물관은 민속학자 송석하가 초대 관장을 지낸 남산의 국립민족박물관이었습니다.
해방 후 국립박물관은 1945년 12월 3일 경복궁에서 문을 열게 됩니다. 처음엔 예산도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죠. 하지만 '한국 박물관의 초석'으로 불리는 초대 관장 김재원(1909~1990)이 25년 동안 국립박물관의 기틀을 세웠답니다. 김 관장은 일부 미군이 경복궁 안의 유물을 기념품 삼아 몰래 가져간다는 걸 알고, 이를 막기 위해 경복궁 안에 있는 관사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어요. 1946년 5월에는 경주의 호우총과 은령총을 조사 발굴했는데, 호우총에선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적힌 유물이 발굴돼 세상을 놀라게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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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관람객 모습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2025년 연간 관람객 세계 3위'라고 적힌 문구가 보여요.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은 루브르박물관, 바티칸박물관에 이어 세계 박물관 중 관람객 3위를 기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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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원 국립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의 옛 이름) 초대 관장입니다. '한국 박물관의 초석'으로 불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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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중앙박물관이 있었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입니다. 1993년 정부가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으로 이 건물 철거를 결정하며 국립중앙박물관도 옮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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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 유물인 삼국시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입니다. /뉴시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선일보 DB
1950년이 되며 위기가 다가옵니다. 6·25전쟁 전 개성은 38선 남쪽에 있었는데, 이곳에는 많은 고려 유물을 소장하던 국립박물관 개성 분관이 있었어요.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 일대가 군사 충돌로 심상치 않자 김 관장은 도자기·불상·회화 등 개성의 유물을 모두 서울로 옮기는 결정을 내렸답니다. 그해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시작해 곧바로 개성을 점령했는데, 그때 이미 분관의 진열장은 텅 비어 있는 상태였대요.
그런데 정작 국립박물관이 있는 수도 서울이 6·25전쟁 발발 3일 만에 북한군에 점령됩니다. 3개월 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 수복에 나섰을 때,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국립박물관 유물들을 북쪽으로 가져갈 가능성이 있었지만, 다행히 유물들은 무사했습니다. 먼저 가져가려 했던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을 포장하는 과정에서 미술관 관계자들이 포장했다가 다시 풀어 버리는 식의 '시간 지연 작전'을 펼쳤고, 결국 다급해진 북한군은 이곳 소장품을 그냥 두고 가버렸습니다. 만약 미술관 유물을 다 트럭에 실었더라면 다음 순서는 국립박물관이 됐을 겁니다.
중공군 참전에 따른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빼앗기게 됐을 땐 국립박물관도 부산 광복동으로 피란을 갔어요.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로 유물을 피란시킬 계획도 세웠었다고 해요. 전쟁이 끝나자 국립박물관은 서울의 옛 남산 분관(옛 일본 총독 관저)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 건물이 군사 시설로 넘어갔고 또 이사를 해야 할 형편에 처하자 김 관장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덕수궁 석조전으로 박물관을 옮기게 해 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래서 1955년 서양식 석조 궁전 건물인 석조전으로 이사했습니다. 네 번째 건물이었어요.
다시 경복궁 안쪽 세 건물 거쳐
덕수궁 석조전 시절 국립박물관은 미국(1957~1959)과 유럽(1961~1962) 순회 전시를 열어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편해 현재의 이름을 갖추게 됐습니다.
이후 국중박은 경복궁 동북쪽 담장 안에 새로 지은 건물(현 국립민속박물관)로 다시 옮겨갔습니다. 다섯 번째 건물이었죠.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 위에 법주사 팔상전 등 여러 전통 건축 양식을 조합한 시멘트 건물인 이 박물관은 지금도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중앙박물관'으로 남아 있어요. 1975년 지방 분관을 지방 박물관으로 개편했고, 1976년엔 보존과학실을 열었죠.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일본·미국·영국·독일 등에서 '한국미술 5000년전'을 열었는데 지금도 회자되는 해외 전시였습니다.
1986년 8월, 국중박은 여섯 번째 건물로 이사했습니다. 정부종합청사와 정부과천청사 신축으로 중앙청 건물이 비게 되자 그곳으로 간 건데요. 그곳이 옛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이었다는 점이 이후 문제가 됐습니다. 1993년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벌이던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옛 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결정하고 미군 기지 자리였던 용산가족공원을 새 박물관 부지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국중박은 일단 1996년 12월 경복궁 남서쪽 건물(현 국립고궁박물관)로 이사했어요. 임시 거처였던 이곳이 국중박의 일곱 번째 건물이었죠.
여덟 번째 용산 새 건물에 안착
마침내 2005년 10월 28일, 국중박은 여덟 번째 건물이자 현재의 건물인 용산 새 건물로 이사했습니다. 당시 이건무 관장은 "긴 세월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셋방살이의 설움이 드디어 끝났다"는 감회를 드러냈어요. 용산 건물은 400m에 이르는 긴 화강암 외벽과 대청마루에서 영감을 얻은 입구가 특징이에요. 하지만 '한국의 박물관이라는 걸 알 수 있는 특징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어요.
현재 국중박의 소장 유물은 약 44만 점으로,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많은 수준입니다. 소장 유물 수 대비 전시율은 4% 정도니,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인 셈이죠. 20여 년 전만 해도 대표 유물인 삼국시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두 점을 특별전 때만 쇼케이스 안에 넣어 함께 전시했지만, 지금은 '사유의 방'에서 쇼케이스 없이 두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어요. 그만큼 전시 기법이 일취월장했다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