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한불 수교 140주년, 인도주의적 '첫 만남'은 따로 있었죠
입력 : 2026.07.16 03:30
| 수정 : 2026.07.16 15:41
나르발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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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년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서 체결된 조약문입니다. 이 조약을 공식적 한·불 관계의 시작으로 봅니다.
프랑스 포경선, 미지의 나라에 도착하다
1850년, 프랑스 북서부의 항구 도시 르아브르에선 포경선(고래잡이 배) 나르발(Narval)호가 출항을 앞두고 있었어요. 선원은 리바랑 선장 등 모두 27명이었고, 3년 치 식량과 고래잡이 장비들로 배는 가득 차 있었습니다. 생석회와 모래 각각 200㎏, 못 1만5000개, 구리 나사 1000개, 판재 50세트 등의 화물이 실렸어요. 19세기 유럽에서 고래는 아주 중요한 자원이었어요. 특히 향유고래의 기름은 불을 밝히는 연료로 쓰였는데, 밝기가 좋고 폭발 위험도 없었다고 해요. '나르발'이란 배 이름 자체가 뿔 하나 달린 일각고래라는 뜻이었습니다.
나르발호는 그해 가을 태평양 하와이의 호놀룰루 앞바다에서 한 차례 향유고래를 잡으려 했지만 실패했죠. 이때 호놀룰루에서 선원 2명이 합류했습니다. 다시 고래를 잡으러 서쪽으로 가다가 1851년 3월 30일 아시아 어느 나라의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 섬은 바로 조선의 전라도 북서쪽 일대에 있는 고군산군도였어요. 조선왕조 철종 2년의 일이었습니다. "이양선(異樣船)이 나타났다!" 조선 사람들은 놀라워했어요. 이양선이란 '모양이 다른 배'란 뜻으로, 주로 19세기 서양 배를 가리켰어요. 현지 관료 2명이 배로 파견됐고, 나르발호에선 물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했지만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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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포경선 나르발호의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프랑스 화가 프레데리크 루(1805~1870)가 그렸습니다.
이후 4월 초 나르발호는 나주목 앞바다에서 강한 북서풍과 큰 파도를 만나 침몰해 버렸어요. 선원 29명은 작은 보트 세 대에 나누어 타고 비금도에 상륙했죠. 이곳이 어디인지를 궁금해하는 프랑스 선원들에게 현지 관리는 "됴선"이라고 했대요. 당시 '됴선'은 '조선'의 실제 발음이었다고 합니다. 이를 들은 선원들은 이곳을 'Tiosane(티오산)'으로 표기했는데, 그때만 해도 나라 이름이 아니라 섬 이름인 줄 알았다고 해요.
현지 지방관은 프랑스 선원들의 소식을 한양 조정에 보고했습니다. 프랑스 선원들은 비금도의 예미포에 임시 야영지를 만들어 생활했습니다. 조선인들이 밤낮으로 감시하긴 했지만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식량과 물도 가져다 주면서 보살폈습니다. 하지만 4월 10일 부선장 아르노를 비롯한 선원 9명은 작은 보트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버렸습니다.
지금은 비금도가 신안군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나주목 관할이었습니다. 나주 목사 이정현 등 관리들이 와서 남은 20명을 조사했고, 그림을 그리고 손짓 발짓을 하며 의사소통을 한 끝에 배가 난파됐고 육로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남은 선원들은 초가집 한 채당 10명씩 거주하게 됐죠. 이들은 이방인을 신기해하는 주민들에게 프랑스어 단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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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르발호와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 샤를 드 몽티니 일행의 항해 경로입니다. 1851년 4월 나르발호 선원들이 비금도에 상륙했고, 이후 이들을 찾아나선 몽티니 일행은 제주도를 거쳐 비금도에 도착했습니다.
한편, 작은 보트로 떠난 프랑스 선원 9명은 나침반만 의지해 항해한 끝에 무사히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4월 19일,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 샤를 드 몽티니는 이들을 만나 사건 경위를 들었고, 다음 날 나르발호 선원 5명과 통역관, 무역회사 경영자 등과 함께 로차(서양과 중국 양식이 혼합된 배)를 타고 조선으로 떠났어요. 이들은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제작한 '조선전도'를 활용했다고 합니다. 4월 25일 제주도에 도착한 뒤 5월 1일 마침내 비금도를 찾아냈습니다.
초가집에 묵고 있던 남은 선원들과 만나, 이들이 비금도 주민들의 보호로 무사히 지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몽티니 영사 일행은 이정현 목사를 만나 통역을 통해 대화할 수 있었고 만찬 대접을 받았습니다. 다음 날 이정현 목사 등 조선 관리들은 이들이 타고 온 배를 방문했는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가져온 조선 술과 프랑스 측 위스키·샴페인·와인을 함께 나눠 마셨다고 합니다. 한국인과 프랑스인이 함께 술을 나눈 첫 기록이라고 해요.
한편 이 일을 보고받은 한양 조정에서는 "혹시 사학(邪學·천주교)을 퍼뜨리려는 자들이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수렴청정(임금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그를 도와 정사를 돌보던 일)을 하고 있던 순원왕후(순조의 왕비)가 표류민 송환 제도에 따라 송환해야 한다고 했고, 결국 그렇게 정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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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달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선물과 기록, 한국-프랑스 우정의 140년’ 개막 언론 공개회에서 참가자들이 옹기 주병을 관람하고 있습니다. 1851년 나주 목사 이정현이 프랑스인들에게 선물로 준 술병입니다. /뉴스1
5월 4일, 식량과 소를 비롯해 짚신, 종이, 곰방대, 대나무 모자, 그릇, 옹기병 등 조선의 생활용품을 실은 프랑스 측 배가 세 발의 대포 소리와 함께 비금도를 떠났습니다. 답례품으로는 샴페인과 와인, 비단 등을 남겼다고 합니다. 선원들은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1851년의 '나르발호 사건'은 이렇듯 훈훈하게 마무리됐습니다.
나르발호 사건을 연구해 온 프랑스 파리시테대 한국학과의 피에르 에마뉘엘 후 교수는 이 사건을 "충돌과 갈등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려 했던 두 나라의 인도주의적 첫 만남"이라 말합니다. 쇄국으로만 알려졌던 조선이 실제로는 표류민을 보호하고 송환하는 제도를 갖추고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이 비금도에서 나주 목사에게 선물로 받았던 옹기 술병은 2015년 프랑스 국립 도자기 박물관 특별전에서 볼 수 있었고, 현재는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의 한·불 수교 140주년 특별전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최근 국내에선 후 교수가 글을 쓴 만화 '나르발호 표류기'(작은곶)가 출간되기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