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밌다, 이 책] 아픈 약자에게 '개인 책임' 묻기 전에 목소리 묻힌 적 없는지 살펴봐야 해요

입력 : 2026.07.02 03:30

우리 몸이 세계라면

[재밌다, 이 책] 아픈 약자에게 '개인 책임' 묻기 전에 목소리 묻힌 적 없는지 살펴봐야 해요
김승섭 지음|출판사 동아시아|가격 2만원

"진화한 민족일수록 혈액형 A형이 B형보다 많다." 얼토당토않은 말이지만, 놀랍게도 옛날엔 널리 퍼졌던 표현입니다.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요. 20세기 초, 폴란드 학자 루드비크 히르슈펠트라는 학자는 16개국 군인 8500명의 피를 뽑아 분석한 뒤 'A형이 B형보다 더 진화했고 우월하다'는 결과를 냅니다. 유럽인에게는 A형이, 비유럽인에게는 B형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는 유럽인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이란 주장이었습니다.

이 해괴한 주장은 동아시아로 건너옵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 있었던 시기입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의료진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피를 분석하곤 '일본인은 마치 유럽인처럼 A형이 많다'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열등하다'고 결론 내렸죠. 혈액형을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겁니다.

이 모든 것은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이뤄졌습니다. 과학이라고 하면 흔히 올바르고, 명확한 근거를 으레 가지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편견이나, 억압하려는 의도가 담겨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는 건강 연구가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그간 인류의 신체에 대한 연구는 모두를 위해 객관적으로 이뤄졌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당당히 '네'라고 답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연구할지, 누구의 몸을 살필지, 연구에 필요한 돈은 누가 주는 것인지, 연구의 배후엔 서슬 퍼런 권력이 있는지 등. 이 모든 것의 영향을 받으며 쌓여온 게 '우리의 몸에 대한 지식'입니다. 책 '우리 몸이 세계라면'은 몸을 대상으로 한 어떤 지식은 생산되고, 반대로 어떤 지식은 생산되지 않았으며, 누가 왜 특정한 지식을 생산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인간의 몸을 '다양한 관점이 각축(서로 이기려 다툼)하는 전장'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떤 관점은 승리했고, 어떤 관점은 패배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전염병 사망자 통계를 보면 조선인 사망자 수가 일본인의 10%에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조선인의 몸이 전염병을 다 피해 갈 만큼 압도적으로 튼튼했던 걸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인의 죽음이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통계가 나온 것이지요. 식민지에 대한 차별과 억압으로 인해 조선인의 죽음이 통계 바깥으로 밀려난 거예요.

약자가 배제되는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소득 국가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절실한 약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구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곤 합니다. 우리는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가난한 자의 죽음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게 맞는 걸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언제 어디에서 왔을까. 사라진 목소리는 없을까. 이런 질문들은 더 많은 사람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이진혁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