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중앙은행·뉴딜 설계한 거장들… 美 경제 대국 이끌었죠
입력 : 2026.07.01 03:30
미국 경제의 거목들
미국과 세계의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한 인물이 최근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을 맡아 '경제 대통령'으로도 불렸던 앨런 그린스펀입니다. 그는 지난 1987년 미국에서 주가가 대폭락해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을 때 금리로 위기 관리에 나서는 등, 18년 넘게 연준을 이끌며 '경제의 구원 투수' 역할을 했어요. 연준은 돈을 빌린 대가로 내야 하는 이자의 비율인 '금리'를 결정하는데요. 경제 위기가 터졌을 때 현상을 정확히 진단하고 그에 맞게 금리를 조정하는 게 문제 해결의 관건이 되곤 합니다.
현재 미국이 세계 최대 경제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린스펀처럼 경제 위기가 터졌을 때 극복 방법을 제시하고 관련 경제 시스템을 설계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미국 대통령이나 기업가의 노력도 중요했지만, 이들은 미국, 더 나아가 세계 경제의 틀을 만든 사람들로도 평가받습니다. 오늘은 이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현재 미국이 세계 최대 경제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린스펀처럼 경제 위기가 터졌을 때 극복 방법을 제시하고 관련 경제 시스템을 설계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미국 대통령이나 기업가의 노력도 중요했지만, 이들은 미국, 더 나아가 세계 경제의 틀을 만든 사람들로도 평가받습니다. 오늘은 이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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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연준 의장 앨런 그린스펀에게 최고의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걸어주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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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초대 재무부 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의 초상화입니다. 그는 '미국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답니다.
미국 경제의 기초를 세운 인물은 바로 초대 재무부 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1755 또는 1757~1804)입니다. 독립전쟁(1775~1783)이 끝난 직후의 미국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전쟁으로 떠안게 된 어마어마한 빚에 시달렸습니다. 주(州)마다 사용하는 화폐가 달라 혼란도 컸고요.
1789년 재무장관으로 임명된 해밀턴은 경제를 중앙으로 통합해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주들이 진 빚을 중앙으로 모았어요. 당시 주들은 독립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달성하려 전쟁을 치르며 각기 다른 금액의 빚을 지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중앙 차원에서 이를 정리하지 않았다면 주들은 전쟁 비용을 두고 끊임없이 논쟁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화폐를 통일할 목적으로 조폐국을 만듭니다.
또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인 '미국 제1은행' 설립을 주도했어요. 안정적인 화폐 유통과 중앙 중심 금융 시스템이 없이는 산업·무역이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조업 육성도 강조했는데요. 제조업의 발전과 육성이 국가 경제 성공에 필수적이라 본 겁니다. 필수 물자를 다른 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확보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제조업에 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자국 산업을 지원하고 보호 관세를 부과했습니다.
그 결과 원래는 느슨한 연합체였던 미국은 강력한 연방국가가 됩니다. 중앙이 경제를 주도하며 미국 산업혁명을 이끌어냈고요. 오늘날 '미국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의 얼굴은 미국 10달러 지폐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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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밀턴이 설립을 주도한 '미국 제1은행'입니다.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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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입니다. 그는 대공황을 극복하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의 이론은 미국의 경제 정책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는 세계 경제학의 흐름을 바꾼 인물 중 하나입니다. 케인스는 영국인이지만 미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29년 미국의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수많은 기업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졌어요. 당시에는 '시장은 스스로 회복된다'는 고전 경제학이 주류였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경제는 갈수록 위축됐습니다.
케인스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도로와 댐을 건설하고 공공사업을 확대해 일자리를 만들면 사람과 기업이 다시 돈을 써 경제가 살아난다는 논리였습니다. 그의 이론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죠. 루스벨트는 농산물 가격을 조정하고,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로 수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습니다. 또 연금처럼 사회 안전망을 제공하는 복지 시스템을 구축했지요.
오늘날 세계 각국이 경제가 어려울 때 대규모 추가경정예산(이미 성립된 예산을 변경해 추가하는 것)을 편성하거나 사회간접자본(도로·항만처럼 산업 발전에 기반이 되는 공공설비)에 투자하는 것도 케인스 경제학의 영향이랍니다. 현대 거시경제학은 케인스를 빼고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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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공황으로 미국 경제가 휘청였을 당시, 실업자들이 무료로 음식을 나눠 주는 곳 앞에서 길게 늘어선 모습입니다. /위키피디아·백악관
1970년대 미국은 또 다른 경제 위기를 맞았습니다. 중동에서의 석유 공급 부족으로 유가가 급등하는 석유 파동이 두 번(1973·1979) 일어납니다. 미국에선 물가 상승과 경제 침체가 동시에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도 나타났죠. 기존의 경제 정책으로는 좀처럼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어요. 이때 등장한 인물이 1979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으로 부임한 폴 볼커(1927~2019)입니다. 그는 매우 과감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기준금리를 20%까지 끌어올리는 초고금리 정책을 시행한 거죠. 기준금리는 일반인이나 기업이 은행에서 돈을 빌릴 때 내야 하는 대출금리의 기준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연준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일반인들이 시중은행에서 돈을 빌릴 때 내야 하는 이자가 비싸집니다. 사람들은 부담을 느껴 돈을 덜 빌리고 소비도 줄어들죠. 물건을 사려는 사람이 줄어들면 물가가 내려가고요. 하지만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니 경제가 어려워질 수 있어요. 실제 당시 높은 금리 때문에 실업률이 계속 상승해 기업과 가계는 큰 어려움을 겪었죠. 볼커에 대한 비판도 컸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물가를 잡지 못하면 미국 경제의 미래는 없다고 보고 이를 밀어붙였어요. 물가 안정을 우선순위로 잡고 과감한 정책을 밀고 나간 거죠.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인플레이션은 진정됐습니다. 물가 상승률은 1982년 6.1%에서 이듬해 3.7%로 떨어졌습니다. 경기 회복도 서서히 이뤄졌고요. 당장 비판을 받더라도 장기적인 경제 안정을 선택한 그의 결단은 지금도 경제 정책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평가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