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北, 76년 전 오늘 '한반도 공산화' 야욕으로 남침했어요
입력 : 2026.06.25 03:30
6·25 발발과 초기 상황
오늘(25일)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지 76주년이 되는 날이에요. 북한의 남침(南侵·북쪽이 남쪽을 침공함)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3년 넘게 이어지며 수많은 인명 피해와 국토 파괴를 부른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김일성의 좌절
1945년 8월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했어요. 그러나 소련군이 남북의 통행과 통신·우편을 차단하면서 38선은 마치 국경처럼 변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9월 9일에는 북한 정부가 수립되면서 남과 북에는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단순히 이 날짜만 보면 마치 38선 남쪽에 먼저 정부가 세워짐으로써 통일 정부가 좌절되고 분단이 이뤄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1946년 2월 북한에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사실상의 '정부'였습니다. 김일성 우상화를 본격화하며 토지 개혁, 산업 시설 국유화를 단행했고, 정식 정부 수립 전에 독자적인 화폐 발행과 군대 창설까지 마쳤습니다.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 했던 김일성의 입장에서 보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그 야욕이 좌절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일성의 다음 행보는 '군사력을 통해 38선 남쪽을 손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소련 지원을 받아 우수한 무기를 갖추게 된 김일성은 소련에 '남침을 할 수 있게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아직 시기상조'라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김일성의 좌절
1945년 8월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했어요. 그러나 소련군이 남북의 통행과 통신·우편을 차단하면서 38선은 마치 국경처럼 변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9월 9일에는 북한 정부가 수립되면서 남과 북에는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단순히 이 날짜만 보면 마치 38선 남쪽에 먼저 정부가 세워짐으로써 통일 정부가 좌절되고 분단이 이뤄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1946년 2월 북한에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사실상의 '정부'였습니다. 김일성 우상화를 본격화하며 토지 개혁, 산업 시설 국유화를 단행했고, 정식 정부 수립 전에 독자적인 화폐 발행과 군대 창설까지 마쳤습니다.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 했던 김일성의 입장에서 보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그 야욕이 좌절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일성의 다음 행보는 '군사력을 통해 38선 남쪽을 손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소련 지원을 받아 우수한 무기를 갖추게 된 김일성은 소련에 '남침을 할 수 있게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아직 시기상조'라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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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 해방 후 북한의 노동절 행사에서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는 모습입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요청했고,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 침공 지원을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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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탱크가 서울 시내를 지나가고 있는 모습. 당시 북한은 탱크 242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군은 탱크가 한 대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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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중앙청에 인공기를 게양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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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전쟁 도중 피란길에 오른 가족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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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전쟁 76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장병 1묘역에서 어린이집 원생들이 참배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DB·노동신문 뉴스1·국사편찬위원회·뉴스1
그런데 1950년이 되자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과 회담을 했습니다. 이보다 앞선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하는 등 국제 정세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필요한 경우 중국이 한반도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됐다'고 판단했습니다. 김일성은 "전쟁은 3일이면 끝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은 개입할 여유조차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마침내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 침공 지원'을 결정했습니다.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의 냉전 대결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1949년 미군이 38선 남쪽에서 철수했고, 1950년 1월 미국이 극동 방어선인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를 제외했던 것도 오판의 근거가 됐습니다. 그해 5월, 김일성은 다시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습니다.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에게 "미국이 전쟁에 개입해 북한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중국이 나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물론,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 모두 침략 전쟁의 책임자였던 것입니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북한군 서울 점령
1950년 5월 중순 이후 북한은 남침 준비를 급속히 진행했습니다. 소련이 보낸 무기와 장비가 북한에 속속 도착했고, 6월 15일에는 남침 준비를 모두 끝냈습니다. 6월 25일 모든 전선에서 전면전을 개시하겠다는 계획이었죠. 병력 수와 장비에서 북한군이 대한민국 국군보다 월등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북한군은 이때 탱크 242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군에겐 탱크가 단 한 대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일요일인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했습니다. 국군은 후퇴를 거듭했습니다. 이미 25일 오전 9시에 개성 방어선이 뚫렸고, 오전에 동두천과 포천까지 함락됐습니다. 북한군은 26일 오후 의정부를 점령한 뒤 27일 정오에는 창동 방어선을 넘었습니다. 28일 새벽엔 한강 이북의 서울 시내가 함락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으로 피란을 갔고, 대다수 서울 시민은 북한군이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에서 그대로 남아야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으니 김일성의 장담이 들어맞은 것일까요? 그러나 전쟁은 결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국군은 한강 방어선 전투에 돌입했습니다. 유엔 안보리의 25일과 27일 결의로 북한군은 침략자로 규정됐고,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27일 미군에 출동을 명령했습니다.
춘천에서 버틴 국군, 남침 속도 늦춰
그런데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3일 동안이나 한강을 건너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공격을 멈추고 머물러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일까요?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의 수장으로 월북한 뒤 북한 부수상을 맡고 있던 박헌영이 '서울만 점령하고 기다리면 남조선 전역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해서 김일성이 그 말을 믿고 기다렸는데, 봉기가 일어나지 않아 망연자실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모든 전선에서 국군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중부 전선인 춘천의 국군 6사단은 27일 오후 6시까지 끈질기게 북한군의 침공을 막아냈고, 이후 전략적으로 후퇴했습니다. 북한군은 30일 오후 늦은 시간이 돼서야 홍천에 들어설 수 있었고, 다음 날인 7월 1일 서부 전선에서도 한강을 건너기 위한 총공세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국군은 북한군의 공세를 늦춘 지연전(遲延戰)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훗날 전쟁 실패 이유에 대해 "초기에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후퇴 뒤 재정비할 시간을 줬던 것"이라 푸념했습니다.
이후 낙동강 방어선 전투와 다부동 전투로 국군은 최후의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지켰고,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북진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서울을 잃고 후퇴하는 1951년 1·4 후퇴를 겪었고,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停戰) 협정이 이뤄질 때까지 계속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