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상호 불가침' 평화 원칙, 3300년 전에도 있었대요
입력 : 2026.06.24 03:30
종전 협정
최근 미국과 이란은 '종전(終戰) 양해각서(MOU)' 서명을 공식 완료했어요. 종전이란 전쟁을 끝낸다는 뜻이고, 양해각서는 정식 협정을 맺기 전에 양측이 서로 합의해 놓은 내용들을 기록한 문서입니다. 두 나라가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최종 평화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첫 단추를 끼운 셈이죠. 이번 서명으로 세계 곳곳에선 이란 전쟁이 끝나리란 기대가 나옵니다. 하지만 마음을 놓아선 안 된다는 걱정의 목소리도 여전히 많아요. 양국 간에 아직 입장이 서로 다른 쟁점들이 있기 때문이죠.
인류 역사를 보면 종교·영토·인종·이념 등을 둘러싸고 서로 입장이 달라 피 흘리며 싸우는 전쟁이 수없이 반복돼 왔습니다. 이와 함께 전쟁을 끝내려는 다양한 협정도 맺어졌죠. 오늘은 종전 협정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300년 전의 상호 불가침 조약
지금으로부터 무려 약 3300년 전 맺어진 평화 조약은 인류의 유산이 돼 지금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집트와 히타이트 두 국가 사이에 이뤄진 협정입니다. 이집트 제국의 강력한 부활을 꿈꾼 파라오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72년 히타이트 정복에 나섰어요. 히타이트는 현재 튀르키예 자리에 있었던 국가입니다. 양측 군대는 카데시(현 시리아 지역) 근처에서 마주했어요. 람세스 2세는 거짓 정보에 넘어가 포위돼 큰 위험에 빠졌지만 곧 탈출에 성공합니다. 카데시 전투는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서로 자기가 이겼다고 기록했기에 승패를 확실히 알 순 없어요. 다만 현대 학자들은 히타이트가 우세했던 것으로 분석합니다.
그리고 전투가 일어난 지 약 15년 후 두 국가 사이 평화 조약이 맺어지는데요. 이 조약이 주목받는 건 상당히 시대를 앞선 내용들이 담겼기 때문입니다. 먼저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습니다. 현대에서도 꾸준히 나오는 표현이죠. 또 양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지원군을 보내주기로 하는 방위 협정, 항구적 평화를 위한 노력 등 내용이 담겼습니다. 조약은 히타이트 언어로 은판에 새겨진 뒤 이집트로 전달됐습니다. 히타이트는 찰흙 점토판에 이를 기록했고요. 이후 두 나라는 람세스 2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전쟁 없이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카데시 협정이 적힌 점토판의 복사본은 현재 미국 뉴욕 UN본부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장 입구에 걸려 있습니다. 인류가 나아가야 할 평화의 이정표를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종교·영토·인종·이념 등을 둘러싸고 서로 입장이 달라 피 흘리며 싸우는 전쟁이 수없이 반복돼 왔습니다. 이와 함께 전쟁을 끝내려는 다양한 협정도 맺어졌죠. 오늘은 종전 협정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300년 전의 상호 불가침 조약
지금으로부터 무려 약 3300년 전 맺어진 평화 조약은 인류의 유산이 돼 지금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집트와 히타이트 두 국가 사이에 이뤄진 협정입니다. 이집트 제국의 강력한 부활을 꿈꾼 파라오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72년 히타이트 정복에 나섰어요. 히타이트는 현재 튀르키예 자리에 있었던 국가입니다. 양측 군대는 카데시(현 시리아 지역) 근처에서 마주했어요. 람세스 2세는 거짓 정보에 넘어가 포위돼 큰 위험에 빠졌지만 곧 탈출에 성공합니다. 카데시 전투는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서로 자기가 이겼다고 기록했기에 승패를 확실히 알 순 없어요. 다만 현대 학자들은 히타이트가 우세했던 것으로 분석합니다.
그리고 전투가 일어난 지 약 15년 후 두 국가 사이 평화 조약이 맺어지는데요. 이 조약이 주목받는 건 상당히 시대를 앞선 내용들이 담겼기 때문입니다. 먼저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습니다. 현대에서도 꾸준히 나오는 표현이죠. 또 양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지원군을 보내주기로 하는 방위 협정, 항구적 평화를 위한 노력 등 내용이 담겼습니다. 조약은 히타이트 언어로 은판에 새겨진 뒤 이집트로 전달됐습니다. 히타이트는 찰흙 점토판에 이를 기록했고요. 이후 두 나라는 람세스 2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전쟁 없이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카데시 협정이 적힌 점토판의 복사본은 현재 미국 뉴욕 UN본부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장 입구에 걸려 있습니다. 인류가 나아가야 할 평화의 이정표를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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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가 카데시 전투에서 적과 싸우는 모습의 암석 조각. 이집트의 유적인 아부심벨 대신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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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네덜란드 화가 헤라르트 테르보르흐가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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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년 국가 정상들이 중동 평화를 위해 미국에서 만났습니다. 왼쪽부터 안와르 엘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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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입니다. 휴양지이지만 대통령이 쉬는 중에도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회의실, 집무실이 갖춰져 있습니다. 군사 시설로 일반인 접근이 엄격히 금지돼 민감한 외교·안보 논의가 이뤄지기도 합니다. /위키피디아•백악관
두 번째로 알아볼 조약은 '베스트팔렌 조약'입니다. 1648년 체결돼 유럽의 '30년 전쟁'을 끝낸 조약이에요. 30년 전쟁(1618~1648)은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입니다. 그 시작은 종교 문제였어요. 당시 유럽에선 가톨릭을 믿는 이들과 새롭게 등장한 개신교를 믿는 사람의 갈등이 커졌어요. 여기에 세력 다툼이 더해집니다. 당시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가문과 이를 견제하려는 프랑스 등 국가가 충돌했고, 각자의 이익을 챙기려고 스웨덴, 덴마크 등도 끼어들면서 유럽 전체는 거대한 전쟁터가 돼 버립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피폐해진 상황을 수습하고 전쟁을 끝내기를 원했습니다. 협상은 쉽사리 성사되지 못했으나, 재차 시도하면서 종전 물꼬를 틉니다. 마침내 페르디난트 3세는 1648년 5월 뮌스터에서 프랑스와, 10월 오스나브뤼크에서 스웨덴을 비롯한 개신교 국가들과 조약을 맺었어요. 두 도시가 베스트팔렌(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동부 일대)에 있었기 때문에 이 강화 조약들을 아울러 베스트팔렌 조약이라고 불러요.
베스트팔렌 조약은 군주들에게 개신교 종파를 선택할 자유를 보장한다고 명시했어요. 교황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아닌 군주가 종교 문제를 결정할 권한을 갖게 된 겁니다. 또 조약을 통해 스웨덴이 독일 북부 땅을 얻고 프랑스는 알자스와 로렌을 획득하는 등 영토에 대한 정리도 이뤄집니다. 정리하면 각 국가 경계가 명확해져 '영토' 안에서 군주의 결정권, '주권'이 확고해진 것입니다. 국가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처럼 근대 국가의 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30년 전쟁의 종전은 유럽, 더 나아가 세계의 틀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미국이 중재한 13일간 협정
1978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맺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현대사의 대표적 종전 협정으로 꼽힙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중동 지역에서 혼란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 아랍 국가들은 반발했고, 이후 30년 동안 양 진영은 전쟁을 네 번이나 치렀습니다.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중동의 불안정한 상황을 안정시키려 했습니다. 중동 문제를 중재해 자신의 지지 기반을 확보하려는 속마음도 있었죠. 1977년 1월 취임한 카터는 중동 평화가 최고 우선 과제라고 천명합니다. 그리고 안와르 엘 사다트(1918~1981)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1913~1992) 이스라엘 총리를 캠프 데이비드로 초대해 서로 합의를 이룰 때까지 기한 없이 논의하도록 했어요. 캠프 데이비드는 백악관에서 북쪽으로 약 100㎞ 떨어진 우거진 숲속에 자리한 미국 대통령의 별장입니다.
협상은 13일 동안 진행됐어요. 사다트는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제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빼앗은 땅)와 요르단강 서안지구, 가자지구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전쟁 배상금도 요구했고요. 협상 과정에서 갈등도 있었지만 미국의 중재 속에서 협상은 극적으로 타결됐는데요.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하기로 한 겁니다. 서로 의견이 다른 국가가 무력 없이 긴 시간 대화를 이어가며 합의를 이끌어 낸 모습에 세계가 주목했어요. 카터의 지지율은 13%에서 51%까지 뛰었고, 1978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사다트와 베긴이 선정됐습니다.
그럼에도 이 협정은 한계가 있었어요. 아랍 세계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 크고 작은 갈등이 계속 이어집니다. 심지어 사다트는 1981년 이슬람 조직에 의해 암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