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독립의 힘은 교육"… 무장투쟁 대신 실력 양성 강조했죠
입력 : 2026.06.18 03:30
안창호
멕시코 중부 도시 과달라하라. 2026 북중미 월드컵에 나선 한국 축구 대표팀이 지난 12일 체코를 상대로 짜릿한 첫승을 거둔 곳입니다. 19일 멕시코와의 경기도 이곳에서 열리죠. 월드컵이 아니었다면 이름을 접하기 어려웠을 수 있지만, 사실 과달라하라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중 한 명과 인연이 있는 곳이랍니다. 바로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 선생이에요.
1917년 미국에서 활동하던 안창호 선생은 교민 초청으로 멕시코를 방문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당시 수도인 멕시코시티의 미국 총영사관에서 대한제국 여권을 인정하지 않아 약 2개월간 미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멕시코에 머물렀답니다. 그곳이 바로 과달라하라예요. 그럼, 오늘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독립운동을 펼친 안창호 선생에 대해 알아볼까요?
1917년 미국에서 활동하던 안창호 선생은 교민 초청으로 멕시코를 방문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당시 수도인 멕시코시티의 미국 총영사관에서 대한제국 여권을 인정하지 않아 약 2개월간 미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멕시코에 머물렀답니다. 그곳이 바로 과달라하라예요. 그럼, 오늘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독립운동을 펼친 안창호 선생에 대해 알아볼까요?
-
- ▲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늘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는 멋쟁이였대요./조선일보 DB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현재 북한 남포시)에서 농부인 안흥국의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얼굴과 목소리가 수려했고, 옛날 이야기책을 어른들 앞에서 소리 내어 읽기를 좋아했다고 해요. 서당에서 공부하던 안창호는 17세가 되던 1895년,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하게 됐습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민족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근대학교인 점진학교를 세우고 교육자가 됐죠.
1902년 24세의 안창호는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1905년 미국 현지에서 공립협회를 세우는데, 이 단체는 이후 북미 최대 한인 자치 단체인 대한인국민회가 됩니다. 나라의 운명이 폭풍 앞 촛불과도 같던 1907년, 안창호는 귀국해 "대한 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애국 계몽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의 뛰어난 웅변이 많은 청년을 감동시켜 항일운동에 투신하도록 하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1908년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했고, 김좌진·이갑 등과 함께 애국 계몽 단체인 서북학회를 세웠습니다.
1907년 조선 통감을 맡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요청으로 그와 만났는데, 이토가 "일본뿐 아니라 한국도 발전시키려 한다"는 사탕발림을 늘어놓자 안창호는 "한국의 개혁과 발전은 한국인 스스로 힘과 노력에 맡겨야 한다"고 당당히 응수했다고 합니다.
-
- ▲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성립을 기념해 찍은 사진입니다. 안창호(앞줄 가운데) 선생은 초대 내무총장을 맡았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남의 재물, 영토, 주권 등을 강제로 자기 것으로 만듦)하자 본격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안창호는 무장 투쟁 세력과는 달리 '실력 양성'을 주장했습니다. 1911년 출국해 19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 단체인 흥사단을 설립했습니다. 흥사단의 기본 정신은 무실(務實·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씀), 역행(力行·힘써 행함), 충의(忠義), 용감(勇敢)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계몽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창호는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든 설계와 계획을 빠짐없이 해야 한다'고 여겨 그것을 실천에 옮겼던 것입니다. 흥사단 창립 때 이미 '독립혁명방략도'를 구상했습니다. 정치·경제·교육에서 평등한 사회를 구현해야 한다는 '3평등 원칙'을 바탕으로 특수 계급이 아니라 반드시 전체 민족이 함께 혁명 사업을 해야 하며, 마지막 단계에서 전체 민중을 총 무장시켜 독립전쟁을 벌임으로써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승만·박용만과 함께 미국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안창호는 1919년 3·1 운동 직후 임시정부 설립 움직임이 일어나자 한인들의 성금을 지니고 중국 상하이로 갔습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이 돼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힘썼습니다.
-
- ▲ 안창호 선생의 일기입니다. /독립기념관
필자는 2008년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구익균(1908~2013)씨를 인터뷰했습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상하이 시절 안창호는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모두를 포용한 큰 인물이었습니다. 좌익은 안창호를 비판하다가도 하숙비가 떨어지면 찾아오곤 했다는 겁니다. 동포들이 애국 성금을 보낼 때 주로 안창호에게만 보낼 정도로 독립운동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구씨는 안창호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참 온화하고, 화도 잘 안 내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분이었죠. 이북 출신인데도 서울말만 썼어요. 밤 10시에 취침하고 아침 6시면 일어나서 식사하고 태극권이나 검술 운동을 했어요. 그것 말고 취미라고는 꽃 가꾸는 일뿐이었는데, 무더운 여름에 온몸이 땀에 젖도록 꽃에 물을 줬습니다. 술은 1~2잔 마시고 나면 얼굴이 빨갛게 돼 많이 하지 못했어요."
늘 양복과 넥타이, 중절모를 깨끗하게 차려입는 멋쟁이였다고도 합니다. 한번은 그를 흠모하던 한 여성이 몰래 침실로 들어와 있었는데 안창호는 조용히 "불을 켜라"고 한 뒤 "이렇게 나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그것을 독립운동으로 돌려라"고 하곤 보냈다고 해요.
-
- ▲ 멕시코 과달라하라 프란세스 호텔 로비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머문 곳’이라고 적힌 동판이 걸려 있는 모습. /뉴스1
안창호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 일제 군경에 체포됐고,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또다시 수감됐습니다. 당시 검사의 심문에 안창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오,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오,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1937년 12월 안창호는 병보석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과 옥살이 후유증으로 폐렴과 간경화 등을 앓았고,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제는 일반인의 조문을 금지하고 장례도 감시했습니다.
도산 안창호의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1973년 지금의 강남구 신사동에 도산공원을 마련해 이장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서울의 변두리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그 주변에 강남의 최고급 상권이 자리 잡았죠. 안창호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