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100년 전 순종 장례식, 학생들이 나서 독립운동 일으켰죠
입력 : 2026.06.11 03:30
6·10 만세운동
어제(10일)는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926년 6월 10일 진행된 이 만세운동은 1919년의 3·1 운동을 계승한 민족적인 항일 독립운동으로 평가받아요. 3·1 운동은 고종 임금의 인산일(因山日·장례일)에, 6·10 운동은 그 아들인 순종 임금의 인산일에 일어났죠. 오늘은 100년 전 순종의 인산일에 일어났던 그 만세운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마지막 황제'의 애통한 죽음
"뭐라고!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다고?"
1926년 4월 25일, 조선 민중은 참담한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이자 조선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던 순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52세의 나이로 승하했다는 내용이었어요. 일제에 저항했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민중에게는 '우리 임금님'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는데 그마저 세상을 떠난 겁니다. 더구나 승하 직후 미국의 한인 신문인 신한민보에 순종의 유언이라는 내용이 실렸어요. '(한일) 병합은 내 뜻이 아니었으니 조약을 파기해 광복하라.'
마지막 임금의 죽음을 맞은 슬픔에, 나라 잃은 애통함과 일제에 강제로 지배당하고 있다는 울분이 더해졌습니다. 전국의 많은 사람이 경성(서울)으로 몰려가 죽은 임금을 애도했지만, 일본 경찰은 강제로 군중을 해산시켰어요. 제2의 3·1 운동이 일어날까 봐 철저히 경계했던 것이죠. 경찰뿐 아니라 육군과 해군 7000여 명을 경성에 집결시키고 부산과 인천엔 함대를 정박해 놨습니다.
'마지막 황제'의 애통한 죽음
"뭐라고!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다고?"
1926년 4월 25일, 조선 민중은 참담한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이자 조선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던 순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52세의 나이로 승하했다는 내용이었어요. 일제에 저항했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민중에게는 '우리 임금님'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는데 그마저 세상을 떠난 겁니다. 더구나 승하 직후 미국의 한인 신문인 신한민보에 순종의 유언이라는 내용이 실렸어요. '(한일) 병합은 내 뜻이 아니었으니 조약을 파기해 광복하라.'
마지막 임금의 죽음을 맞은 슬픔에, 나라 잃은 애통함과 일제에 강제로 지배당하고 있다는 울분이 더해졌습니다. 전국의 많은 사람이 경성(서울)으로 몰려가 죽은 임금을 애도했지만, 일본 경찰은 강제로 군중을 해산시켰어요. 제2의 3·1 운동이 일어날까 봐 철저히 경계했던 것이죠. 경찰뿐 아니라 육군과 해군 7000여 명을 경성에 집결시키고 부산과 인천엔 함대를 정박해 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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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마지막 군주였던 순종의 장례식 행렬 모습이에요. 6·10 만세운동은 순종의 인산일에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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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종의 어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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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0 만세운동을 계획한 권오설의 일제 감시 대상 인물 카드. 조선총독부는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추적·체포하기 위해 이 카드를 만들어 관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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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00주년 6·10 만세운동 기념식에 참가한 학생들입니다. /위키피디아·국사편찬위원회·뉴시스
조선 시대 왕실에선 보통 애도 기간을 길게 갖기 때문에 사망한 날로부터 몇 달 뒤에 장례식을 열었답니다. 이에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을 기해 대규모 만세운동을 벌인다는 계획이 세워졌죠. 대략 세 갈래로 추진됐습니다. 첫째 사회주의와 천도교 계열, 둘째 사직동계 학생 계열, 셋째 통동(통인동)계 학생 계열이었습니다.
먼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권오설(1897~1930)을 중심으로 노총(노동조합 총연맹)과 인쇄 조합원들의 6·10 만세운동이 계획됐어요. 권오설은 천도교와 접촉했고, 천도교 측에서 격문(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의 인쇄와 배포를 맡기로 했죠.
그런데 발각돼 버립니다. 6월 3일, 일본 경찰이 이상화의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불온(不穩·사상이나 태도가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음) 시'로 규정하고 이 시가 실린 잡지 '개벽' 6월호를 압수하려고 천도교당 안에 있는 개벽사를 수색(일명 '개벽지 압수 사건')한 게 발단이었습니다. 일본 경찰은 천도교당 안에 숨겨 놨던 격문 5만장을 발견하죠. 이상화의 이 시는 최근 들어 '6·10 만세운동을 예견한 일종의 암시'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와 함께 중국인 지폐 위조범이 경성에 잠입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의 수색 과정(일명 '중국 지폐 위조 사건')에서 엉뚱하게도 재떨이에 버려졌던 찢어진 격문 한 장이 발견됐는데요. 격문의 출처를 추적하던 경찰은 격문이 권오설과 연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결국 만세운동을 계획했던 권오설은 체포됩니다.
철천지 원수 일제를 몰아내자, 대한독립만세!
주동자가 잡혀 갔고 계획이 탄로 났으니, 만세운동은 이대로 좌절되고 말았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두 갈래 학생 세력이 더 있었습니다. 전문학교(지금의 대학교) 중심의 '사직동계'는 6월 9일 김종찬의 하숙방에서 이병립이 격문을 작성했습니다. "2천만 동포의 원수를 구축(驅逐·몰아서 쫓아냄)하라! 피의 대가는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 격문은 1만장이 인쇄됐고 학생들은 각자 이를 배분했습니다.
중등학교(지금의 고등학교) 중심의 '통동계'는 5월 29일 김재문의 하숙방에서 이런 격문을 써서 5000장을 인쇄했습니다.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000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일제는 주로 기성 독립운동가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거사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대한독립만세" 외치며 격문 살포 나서
6월 10일 당일, 순종의 인산일에 참여한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해 있었습니다. 오전 8시 30분,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이선호의 "대한독립만세" 선창에 이어 중앙고등보통학교(서울 종로구 중앙고의 전신) 학생 수백 명이 용감하게 "만세"를 제창했고, 격문 1000여 장을 살포하며 태극기를 높이 흔들었습니다.
8시 45분 관수교 부근에서 보성전문학교(고려대의 전신)와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학생들 역시 만세를 불렀습니다. 군중이 합세해 시위는 확대됐습니다. 오후 2시 20분에도 동묘 부근에서 중앙고보생들이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일제 군·경의 탄압으로 만세운동은 끝내 저지됐습니다. 지방 곳곳에선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번졌습니다. 서울에서 210여 명, 전국적으로 1000여 명의 학생이 체포됐습니다.
주동 학생들은 법정에서도 당당했습니다. 재판장이 거사의 동기와 목적을 묻자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새삼 물어볼 것이 어디 있느냐?"(이병립)고 답했고, "자유를 절규하면 자유가 생긴다는 결심으로 거사에 임하였다"(이선호)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0여 명의 학생이 수감됐습니다.
좌·우가 손잡은 민족운동
6·10 만세운동은 1920년대 중반 일시적으로 침체돼 있던 국내외 항일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줬고, 학생들이 독자적인 항일 운동의 주체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한 3·1 운동에서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가는 교량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6·10 만세운동은 3·1 운동처럼 장기간에 걸친 거족적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고, 일각에선 '실패한 운동'으로 여겨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최근 들어 새로운 평가가 나옵니다.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대한독립' 아래 연대한 민족 협동전선이었으며, 이 연대의 경험은 다음 해인 1927년 신간회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거죠. 신간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민족 협동 전선으로 출범한 독립운동 단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