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조선의 무관 시호 '충무', 이순신 외에도 11명 받았어요

입력 : 2026.06.04 03:30

충무공

우리가 잘 아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외에도 조선 시대에 '충무공'이라는 이름을 받은 영웅이 11명이나 더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를 지킨 이들에게 국가가 내린 가장 특별한 영예이자 역사적 성적표였던 '충무'라는 '시호(諡號)'의 비밀을 살펴보겠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죽은 사람의 한평생을 평가하고, 그의 인생에 맞는 글자를 골라 특별한 이름을 내려줬는데 이를 '시호'라고 부르죠.

수나라 양제, '양'은 폭군을 의미

시호의 기원은 고대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왕이나 제후가 죽은 다음, 그의 일생을 평가해서 잘 다스린 왕에게는 '문(文)' '성(成)' 등의 글자를, 반대로 나라를 망친 왕에게는 '영(靈)' '양(煬)' 같은 글자를 시호로 줬습니다. '문(文)'은 보통 학문을 숭상하고 교양 있게 나라를 통치했다는 의미예요. '성(成)'은 큰 업적을 이루거나 나라를 안정적으로 발전시켰다는 뜻입니다. 반면, '영(靈)'은 변덕스럽고 이상한 일을 많이 벌였다는 부정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양(煬)'은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폭군처럼 백성을 괴롭혔다는 뜻이죠. 무리한 고구려 정벌과 사치로 나라를 망쳤다고 평가받는 수나라 양제의 시호에도 '양(煬)' 자가 들어갑니다.

시호 제도는 우리나라에선 삼국 시대 즈음 신라에서 사용되기 시작해 조선 때 적극적으로 사용됐습니다. 조선에서 시호를 정할 때는 당대 최고 학자들이 모인 홍문관에서 죽은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고 그에 가장 어울리는 글자를 골랐습니다. 같은 사람이어도 누구에게는 좋은 사람일 수 있고, 다른 이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가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시호는 죽은 사람을 세상이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지표였고, 때로는 왕조차도 신하들의 여론을 함부로 뒤집을 수 없었습니다.

시호는 원래 정2품 이상의 높은 관리들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이보다 지위가 낮다 해도 특별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거나, 무엇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사람들에게도 시호가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시호를 내리는 규정이 바뀌게 된 것은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치열한 전쟁을 거치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을 최대한 기리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수 양제(가운데)의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양(煬)'은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폭군처럼 백성을 괴롭혔다는 뜻을 담은 시호예요.
수 양제(가운데)의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양(煬)'은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폭군처럼 백성을 괴롭혔다는 뜻을 담은 시호예요.
충무공 이순신의 초상화. 조선의 충무공은 이순신을 포함해 총 12명이랍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초상화. 조선의 충무공은 이순신을 포함해 총 12명이랍니다.
경남 진주에 있는 충무공 김시민 동상이에요. 김시민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죠.
경남 진주에 있는 충무공 김시민 동상이에요. 김시민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죠.
충무공 정충신의 영정이에요. 정충신은 신분이 낮았지만 무과에 합격해 정묘호란 때 장군으로 활약했어요. /위키피디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충무공 정충신의 영정이에요. 정충신은 신분이 낮았지만 무과에 합격해 정묘호란 때 장군으로 활약했어요. /위키피디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관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시호

신하들이 받을 수 있는 시호는 굉장히 다양했지만, 그중 무관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시호 중 하나는 '충무'였습니다. 나라에 충성을 다한다는 '충(忠)', 그리고 뛰어난 무력을 가졌다는 '무(武)' 두 가지 좋은 글자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충무 시호는 매우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인물들이 가졌습니다. 삼국지에서 촉나라의 기둥이었던 제갈공명이나, 남송을 지탱했던 위대한 장군 악비 같은 인물들도 충무 시호를 받았죠.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충무공 이순신이지요.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조선 육군이 연패하는 동안 옥포대전을 시작으로 거의 모든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도중 누명을 쓰고 잠시 파직되기도 했지만, 조선 수군이 궤멸의 위기에 빠졌을 때 명량대첩에서 겨우 13척의 배를 이끌고 수백 척 배를 가진 왜군을 이겼습니다. 이순신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고 올린 보고 때문에 12척의 배로 싸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명량대첩에는 수리를 마친 배 1척이 추가되면서 총 13척이 투입됐다고 해요.

이순신이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1598년)에서 전사한 지 무려 45년 뒤인 인조 21년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생전 모함으로 옥살이를 하고 백의종군(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감)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정국도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런 여러 사정 속에 시호가 내려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지요.

'충문' 시호를 받은 대표 인물은

우리에게 익숙한 충무공 이순신을 포함해 조선 역사상 충무 시호를 받은 인물은 총 12명입니다. 임진왜란 3대 대첩(한산도 대첩·행주대첩·진주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에서 싸운 김시민의 시호도 충무공입니다. 김시민은 관군·백성 연합군 약 4000명을 이끌며 3만명의 일본군과 싸워 진주를 지켜냈습니다. 이 덕분에 일본이 호남 지역을 점령하지 못하고, 전쟁의 흐름이 조선에 유리하게 바뀌었죠. 비록 김시민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덕에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결국 김시민도 충무공이 돼 그의 업적이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죠.

또 한 명의 유명한 충무공은 정충신입니다. 정충신은 원래 신분이 낮아 높은 벼슬길에 오르기 어려웠어요. 어린 시절에는 권율 장군의 부대에서 심부름을 하며 지냈는데, 어느 날 적의 움직임을 알리는 중요한 편지를 목숨을 걸고 전달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해요. 이를 계기로 권율은 정충신의 용기와 재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후 정충신은 학문과 무예를 꾸준히 익혔고, 결국 무과에 합격한 정충신은 정묘호란 때 최고위급 장군으로 활약하며 나라를 지켜 충무 시호를 받았습니다.

한편, 칼이 아닌 붓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주어진 시호에는 '문성(文成)'과 '충문(忠文)' 등이 있습니다. 특히 '충문'은 '충무'와 짝을 이루죠. 문성 시호는 한반도에 처음 성리학을 소개한 안향과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율곡 이이가 받았습니다. 충문 시호를 받은 대표적 인물은 성삼문이에요. 삼촌인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에게 사실상 왕위를 빼앗기고 폐위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당한 충신 여섯 명을 '사육신'이라고 부르는데요. 성삼문은 사육신 중 한 명이었습니다. 숙종 때 단종이 복권되면서 사육신을 비롯한 신하들도 시호를 받게 됩니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옳은 일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역사가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자는 나라의 메시지였던 셈이죠.
이한 작가·'한잔 술에 담긴 조선' 저자 기획·구성=정해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