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변씨삼천지교', 아들 이순신을 영웅으로 키워냈어요

입력 : 2026.04.30 03:30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 변씨

지난 28일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 탄신 481주년이 되는 날이었어요. 앞서 지난 25일 서울 중구가 이순신 장군의 탄생지 인근인 명보아트홀 사거리 일대에서 '2026년 이순신 축제'를 열었는데, 4만여 명이 찾았다고 해요. 이순신 장군이 자란 충남 아산시에선 다음 달 3일까지 '제65회 아산 성웅 이순신 축제'가 열리고 있답니다.

그런가 하면 충남 태안군이 근흥면 정죽리에 '충무공 이순신 어머니 초계 변씨의 안흥량(安興梁) 해상 유적지' 안내판을 설치했다는 뉴스도 나왔어요. 영웅 이순신을 키워낸 어머니와 관련된 유적이라는 겁니다. 오늘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초계 변씨(1515~1597)가 어떤 인물이었고, 안흥량에는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아들 이순신을 '문무겸전'의 인물로 길러

초계 변씨에 대해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여장부이자 위대한 어머니'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는 이정(1511~1583)과 결혼해 이희신·요신·순신·우신 네 아들을 낳아 길렀습니다. 위인전이나 드라마를 보면 이순신 장군의 할아버지 때부터 가세가 기울어 변씨가 삯바느질을 할 정도로 가난했다고 묘사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변씨가 1576년(선조 9년) 셋째 아들 이순신의 무과 합격을 기념해 자신의 재산을 네 아들에게 나눠준 문서가 최근 확인됐는데, 전국 각지에 흩어진 노비 21명과 토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이민웅 '이순신 평전') 크게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순신 장군에게는 선대에서 물려받은 경제적 기반이 있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변씨는 아들을 훌륭한 인물로 키우기 위해 세 곳의 거처에서 살았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원래 이순신 가족이 살던 서울의 건천동(지금의 인현동)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모여든 곳과 가까워 자식을 교육하기에 좋은 곳이었죠. 그러나 남편 이정이 벼슬길에서 멀어지자 가문의 평판을 걱정해 서울을 떠나 충남 아산의 변씨 집성촌으로 이사하는 결단을 내렸다고 해요.

이순신 장군은 무관의 길을 걸었지만, 20세까지는 무과가 아니라 문과를 공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무겸전(文武兼全·문과 무를 모두 갖춤)의 소양을 갖게 됐는데, 여기에 어머니 변씨의 '설계'가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와요.

충남 태안군이 근흥면 정죽리에 세운 '충무공 이순신 어머니 초계 변씨의 안흥량 해상 유적지' 안내판입니다.
충남 태안군이 근흥면 정죽리에 세운 '충무공 이순신 어머니 초계 변씨의 안흥량 해상 유적지' 안내판입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 어머니를 찾아뵙는 장면을 담은 그림입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 어머니를 찾아뵙는 장면을 담은 그림입니다.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있는 거북선 모형이에요.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있는 거북선 모형이에요.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입니다. /동국대 여해연구소•국가유산청•지식재산처•남강호 기자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입니다. /동국대 여해연구소•국가유산청•지식재산처•남강호 기자
"가서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으라!"

그런데 위에서 '세 곳의 거처'라고 했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한 해 전인 1591년,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도의 수군(水軍)을 통솔하는 무관 벼슬인 수군절도사로 임명돼 여수로 부임했습니다. 변씨도 70대의 고령이었는데도 아산에서 여수 고음내(지금의 웅천동)로 먼 길을 이사했어요. 이를 놓고 이순신 장군이 여수로 부임할 때 변씨가 아들을 정신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같이 여수로 내려갔다는 해석도 있고,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이 어머니를 모셔온 것이란 분석도 나옵니다.

이렇게 세 곳의 다른 거처에서 아들을 가르쳤다는 의미에서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 교육을 위해 세 곳의 다른 거처로 집을 옮겼다'는 고사인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에 비길 만하다고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윤동한 '조선을 지켜낸 어머니') 한마디로 '변씨삼천지교'였던 셈이죠. 나아가 이순신 장군의 자주·자립 정신과 절제력, 역경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판단력은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은 옥포, 당포, 한산, 부산포 등 네 차례에 걸친 출정으로 일본 해군을 궤멸하고 임진왜란 초기의 해전을 끝냈습니다.

여전히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1월, 잠시 어머니를 뵈러 온 이순신 장군은 함께 아침 식사를 한 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변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대설국욕·大雪國辱)!" 아, 정말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머니도 이순신 장군처럼 나라 일을 걱정하는 마음과 기개가 대단했던 것이죠.

늘 전투 준비와 수행에 바쁜 이순신 장군은 여러 차례 모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서도 다행한 일이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초조한 마음이다."

'죄인'의 신분으로 어머니의 시신을…

어머니를 늘 극진히 대하면서도 백발을 보고 노심초사하던 이순신 장군은 1596년 10월 9일 모친을 찾아와 온종일 곁을 지킨 뒤 이튿날 한산도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순신과 어머니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1597년 2월 26일, 선조 임금은 '이순신이 왕명을 거부했다'는 잘못된 판단으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고초를 겪은 뒤 4월 1일에야 백의종군(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감)을 위해 옥을 나섰습니다. 아들을 걱정한 어머니 변씨는 배를 타고 여수에서 아들이 머무르고 있는 아산으로 가는 긴 여정에 올랐습니다. 변씨가 탄 배가 가까스로 충청도 안흥량에 정박한 날이 4월 9일이었습니다. 이곳은 최근 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의 고증을 통해 유적지 안내판이 설치된 장소입니다

그런데 4월 11일, 안흥량에서 아산으로 배를 타고 가던 도중 변씨는 배 위에서 8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틀 뒤 근처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 장군은 "달려 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며 애통한 심정을 기록했습니다. 4월 13일, 이순신 장군은 '죄인'의 신분으로 게바위(지금의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실은 배를 맞았습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통곡하며 절규한 내용은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자 했건만 죄가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께 효도하려 했으나 어버이마저 떠나셨네." 충효의 화신이라 할 이순신 장군이 마치 '불충·불효자'처럼 돼 버린 부조리한 상황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슬픔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백의종군을 마친 이순신 장군은 명량과 노량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다시 나라를 구하게 됩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기획·구성=정해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