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유럽 뒤흔든 30년 전쟁,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났죠

입력 : 2026.04.29 03:30

종전 협상

지난 25~26일(현지 시각) 파키스탄에서 열릴 것으로 예상됐던 미국과 이란의 2차 종전 협상이 사실상 무산됐습니다. 올해 2월 28일부터 시작된 미국과 이란의 전쟁은 휴전과 갈등이 반복되며 좀처럼 해결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어요.

무력 충돌로 시작되는 전쟁은 협상 테이블에서 타협점을 찾아 끝나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미국과 이란의 협상이 곧 재개될지 기대하고 있어요. 역사 속에서 전쟁을 멈추는 데 성공한 협상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 협상은 이후 국제 질서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베스트팔렌 조약과 '국가 주권'의 탄생

17세기 유럽을 뒤흔든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1618~1648)'은 평화 협상이 열려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끝났는데요. 이 전쟁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된 최초의 국제 전쟁이라고 불려요.

30년 전쟁은 가톨릭을 지지하는 신성로마제국과 개신교를 따르는 국가들의 충돌로 시작됐어요. 1618년 '프라하 창문 밖 투척 사건'이 전쟁의 촉매제 역할을 했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보헤미아 지역에는 개신교도가 많았지만, 가톨릭을 믿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고 있었어요. 17세기 초 합스부르크 왕가의 종교적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보헤미아인들의 불만이 커졌습니다. 결국 1618년 프라하 성에서 개신교 귀족들이 가톨릭 관리들을 성 밖 창문으로 던져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는 곧 전면전으로 확대됐습니다. 개신교 세력은 덴마크·스웨덴·프랑스 등 외부 지원을 받아 맞섰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이 전쟁은 유럽에서 약 800만명의 인명 피해를 낳았으며, 경제와 농업 기반까지 흔들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며 각국은 점점 동력을 잃어갔지요. 결국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이 본격적으로 추진됐고, 1648년 마침내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종료됩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권한은 약화됐습니다. 각 영토의 제후(영토를 가지고 백성을 지배하던 사람)는 종교를 선택할 권리를 재확인받았고 선택할 수 있는 종교의 범위도 넓어졌습니다. 외부 세력은 이를 간섭하지 않기로 합의했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국가 주권' 개념의 출발점이었어요. 정치적으로는 스웨덴이 북부 지역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부상했고 프랑스는 유럽 내에서 영향력을 강화했습니다.

1618년 '프라하 창문 밖 투척 사건'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 사건은 '30년 전쟁'으로 이어졌어요.
1618년 '프라하 창문 밖 투척 사건'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 사건은 '30년 전쟁'으로 이어졌어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모습을 담은 작품. 이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종결됐어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모습을 담은 작품. 이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종결됐어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카를로스 2세 초상화입니다(왼쪽). 프로이센의 재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카를로스 2세 초상화입니다(왼쪽). 프로이센의 재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71년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의 황제로 선포되는 장면 그림입니다. /위키피디아
1871년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의 황제로 선포되는 장면 그림입니다. /위키피디아
유럽의 '세력 균형' 위트레흐트 조약

170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카를로스 2세는 유언으로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사망했어요. 이때 조건은 필리프가 프랑스와 스페인 왕위를 동시에 상속받지 않을 것이었죠. 그러나 루이 14세가 스페인 왕으로 즉위한 필리프에게도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인정해주자 주변국들은 불안해했어요. 프랑스와 스페인이 하나의 세력으로 결합한다면 유럽을 좌지우지할 새로운 강대국이 될 수 있었거든요.

이 상황을 가장 경계한 것은 영국과 네덜란드였답니다. 양국은 프랑스의 팽창을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함께 동맹을 결성했고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다 1711년 전쟁 도중 오스트리아의 카를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만약 전쟁에서 이겨 카를이 스페인 왕위까지 차지한다면,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제국이 탄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전쟁의 목적도 프랑스를 견제하는 데서 오스트리아의 팽창을 막는 방향까지 포함하게 됐습니다.

영국은 균형을 유지하는 선에서 협상을 추진해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됩니다. 이 협상에서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통합을 금지하는 절충안이 나왔습니다. 동시에 영국은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지브롤터 해협을 확보하며 해상 패권 국가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세력 균형'이라는 개념이 외교의 핵심 원칙으로 자리 잡았어요. 전쟁의 목적이 상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견제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죠.

세계 대전으로 이어진 프랑크푸르트 조약

19세기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은 유럽의 세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이었어요. 당시 독일 지역은 수십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었고 그 중심에는 프로이센이 있었습니다. 프로이센의 재상(최고 행정 책임자)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독일 통일 수단으로 삼는 '철혈 정책'을 추구했어요. 통일의 마지막 단계인 남독일 지역의 통합을 위해서는 외부의 적이 필요했습니다. 남독일 국가들은 프랑스를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와의 전쟁은 독일 내부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었죠.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결정적인 계기는 '엠스 전보 사건'이었는데요. 프로이센 국왕과 프랑스 대사의 면담 내용을 비스마르크가 의도적으로 축약·수정해 발표하면서 마치 양국이 서로를 모욕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입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여론을 자극했고 결국 1870년 프랑스가 먼저 전쟁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프랑스 수도 파리를 포위해 파리는 결국 1871년 1월 항복했어요.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새로운 독일 제국의 황제 대관식을 거행합니다. 프랑스의 중심 공간에서 독일 통일이 선언된 것은 프랑스에게 큰 굴욕이었어요. 이후 전쟁은 종결 단계로 접어들었고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이 체결됩니다.

이 조약의 내용은 프랑스에게 매우 가혹했어요. 프랑스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했을 뿐 아니라, 알자스-로렌 지역을 독일에 넘겨줘야 했습니다. 중요한 자원이 풍부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상징성이 큰 지역이었어요.

이후 프랑스에서는 '복수' 정서가 확산됐고 이는 수십 년 동안 이어져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한편 독일은 이 전쟁을 통해 통일을 완성하고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습니다. 이 사례는 협상이 전쟁을 끝낼 수는 있지만 그 방식에 따라 미래의 갈등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정해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