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조선 말기 군인 봉기… 中·日에 침탈 계기 열어줬죠

입력 : 2026.04.23 03:30

임오군란과 제물포조약

국립중앙박물관이 '새로 맞이한 기증 유물전'을 연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경주 이씨 가문의 후손이 지난해 말 기증한 유물 9점이 처음으로 공개되는데, 특히 귤산 이유원(1814~1888)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 작품이 있다는 사실만 전해졌을 뿐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이기 때문이에요.

조선 말의 문신인 이유원은 좌의정(지금의 부총리급)과 영의정(지금의 국무총리급)을 지냈고, 흥선대원군의 하야(정계나 관직에서 물러남)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어요. 대단한 갑부이기도 했는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그의 양자(아들이 없는 집에서 데려다 키우는 조카뻘 남자 아이) 이석영이 이를 모두 처분하고 친형제인 이회영·이시영 등과 함께 중국 만주로 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습니다. 이 중 이시영은 훗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됩니다. 이유원의 재산은 현재 가치로 약 1조원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이유원이 맡았던 중요한 역사적 역할이 하나 더 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제물포조약이 체결될 때 전권 대신이었죠. 전권 대신은 나라를 대표하는 권한을 위임받아 파견하던 외교 사절을 가리킵니다. 오늘은 임오군란과 제물포조약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물포조약 당시 전권 대신을 지낸 이유원의 초상화입니다(왼쪽).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촬영한 흥선대원군의 사진이에요. 1898년 이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물포조약 당시 전권 대신을 지낸 이유원의 초상화입니다(왼쪽).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촬영한 흥선대원군의 사진이에요. 1898년 이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에요.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에요.
임오군란으로 일본 공사관이 불타자, 일본 영사 등이 작은 배를 타고 탈출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위키피디아
임오군란으로 일본 공사관이 불타자, 일본 영사 등이 작은 배를 타고 탈출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위키피디아
부패한 관리들, 군인에게 줄 쌀을 빼돌려

임오군란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저 한국 개화기의 복잡한 국면 중 '차별받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난'으로, 단발적으로 일어난 사건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크게 보면 한국 근대사의 아주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의 자체적인 개화가 좌절된 반면,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에 압박을 받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에요. 한마디로 망국(亡國)으로 치닫게 된 결정적 사건입니다.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기나긴 쇄국에서 벗어나 나라의 문을 여는 개항(開港)을 하게 됐습니다. 기존의 국방 체제인 5군영을 개편해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 체제로 바꾸고, 일본 군인에게 훈련을 받는 '별기군(別技軍)'이라는 신식 군대를 창설했습니다.

관심이 온통 별기군으로 쏠리는 동안 무위영·장어영 '구식 군대'는 급료조차 제때 받지 못할 정도로 홀대를 받았습니다. 왕비 민씨(명성황후)의 친척들인 민씨 일족이 조정을 장악한 상태에서 부패와 군납 비리가 심각했습니다.

1882년 전라도에서 온 쌀이 선혜청에 도착했습니다. 선혜청이란 관청에 대해 조금 설명이 필요한데요.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생겨난 관청이었어요. 각 지방에서 중앙에 특산물을 바치는 것을 공납(貢納)이라고 했는데, 백성을 괴롭게 하는 폐단이 많아 쌀과 포목, 돈으로 대신 내게 하는 세제 개혁이 바로 대동법이었습니다. 선혜청이 바로 이 물자들을 보관·관리했기 때문에 군인들에게 줄 쌀도 맡게 된 것이죠.

6월 5일, 무위영과 장어영 군인들은 13개월이나 밀린 급료 중 그나마 한 달 치를 쌀로 지급받았습니다. 그런데 받은 쌀의 절반 정도에 모래나 곡식 껍질이 섞여 있었던 거예요. 부패한 관리들이 중간에서 쌀을 빼돌렸던 겁니다. 흥분한 군인들이 선혜청으로 달려가 새로 지급할 것을 요구했으나 담당 관리는 뻣뻣하게 굴다가 군인들에게 구타를 당합니다.

궁에 들이닥친 군인들… 대원군 일시 재집권

당시 선혜청의 책임자는 병조판서(지금의 국방부 장관)이자 왕비의 친척 오빠인 민겸호였어요. 군인들의 급료 지급이 늦어진 것과 쌀을 빼돌린 책임이 모두 있는 인물이었는데, 조정에선 그런 그에게 사건 조사를 시켰습니다. 폭행 사건을 주도한 군인들은 옥에 갇혔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부패 사건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약자를 윽박지르는 것으로 사태를 무마하려 한 것이죠. 결국 화가 난 나머지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여기에 한양 안팎 백성 일부가 가세했습니다. 이들은 9년 전에 실각한 임금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무기고와 포도청(범죄자를 맡던 관청), 의금부(죄인 신문을 맡던 관청)도 습격했어요. 나아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을 살해했죠. 6월 10일 궁궐 안까지 쳐들어가 민겸호 등을 살해했습니다. 왕비 민씨는 궁궐을 빠져나가 피신하고, 입궐한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되찾아 섭정(군주를 대신해 다스림) 통치를 재개하려 했습니다.

중·일 두 나라의 침탈 계기가 돼

그런데 돌연 청나라가 4000명의 병력을 조선에 파견한 뒤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버립니다. 또 청군은 변란을 주도한 조선 군인들도 체포합니다. 이에 다시 왕비가 궁으로 돌아오면서 임오군란은 일단락됩니다. 하지만 그 여파는 대단히 컸어요.

조선 왕조 개국 이래 중국은 명목상의 천자국(세계의 중심 나라)이었지만 조선 내정에 이처럼 직접 간섭한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조선이 다른 나라에 침략당한 것도 아닌데, 중국이 조선에 병력을 보내 내정에 간섭했을 뿐 아니라 임금의 아버지를 잡아간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죠. 앞서 1840년과 1856년 1·2차 아편전쟁에서 서구 열강에 패했던 청나라가 제압할 수 있는 '만만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던 겁니다. 그사이 청나라는 서양의 기술을 도입해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양무운동(洋武運動)을 벌여왔는데, 이를 통해 쌓은 힘을 조선에서 과시한 셈이죠.

일본 역시 임오군란 때 입은 피해를 이유로 조선에 군란 책임자 처벌과 배상·사과를 요구하는 한편, 조선에 약간의 병력을 두겠다고 하곤 군대 1개 대대를 주둔시키게 됩니다. 임오군란 사후 처리를 위해 1882년 7월 17일 체결한 '제물포조약'에 의한 것이었죠. 이 조약은 조선의 자주적인 사법권을 무시한 일종의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이후 청과 일본은 조선을 사이에 두고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이 다툼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결국 일본이 이길 때까지 계속 이어지죠.

임오군란은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개화 정책에 대한 군민(軍民)의 반란'으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조선 정부가 개화를 하기에 앞서 기본조차 서지 않았던 부패한 시스템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현실은 조선이 19세기 말이라는 중요한 시점에 중·일이라는 주변 외세로부터의 핍박과 침탈을 받게 되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답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기획·구성=정해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