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공산주의 마녀사냥'… 1950년대 美 혼란에 빠트렸어요
입력 : 2026.02.11 03:30
매카시즘
-
- ▲ 1947년 미국에서 출간된 반(反)공산주의 만화입니다. 소련인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미국인들이 그려져 있어요. ‘이것이 내일인가, 공산주의 체제 아래 미국’이라고 써 있어요. /위키피디아
원래는 의회의 소환 요구를 거부하다가 입장을 바꾼 것인데요. 당초 그는 "(소환 요구가) 우리를 투옥하기 위해 설계됐다"며 자신을 '매카시즘' 피해자에 빗대기도 했어요. 매카시즘이란 1950~1954년 미국을 휩쓸었던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입니다. 적발된 사람 대부분은 사실 공산주의와 관련이 없었지만 탄압을 받았어요. 오늘은 매카시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만든 매카시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중심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이 심화했어요. 1940년대 말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죠.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며 중국도 공산주의 국가가 됐는데요. 당시 미국 기업이 대거 진출해 있던 중국의 공산화는 미국인들의 두려움을 키웠습니다.
미국 공화당 출신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는 이 두려움을 이용했어요. 1950년 2월 매카시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연설하던 중 폭탄 선언을 합니다. '미국 국무부에 공산주의자들이 몰래 활동하고 있으며 그 명단을 갖고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매카시의 폭로로 미국 전체가 충격에 빠졌어요. 국무부는 미국 정부의 핵심 기관이니까요. 미국 상원은 즉시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언론은 관련 뉴스를 크게 보도했어요. 대부분 매카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았죠. 의심하면 공산주의자로 오해받는 분위기였거든요.
그 명단은 의례적으로 하는 단순 조사 대상자까지 포함된 FBI(연방수사국)의 안보 관련 명단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대부분 이미 오래전 국무부를 그만둔 인물들 이름이었죠. 하지만 이런 내용은 당시 알려지지 않았어요.
약 한 달 후인 3월 시사 만화 평론가 허버트 블록이 워싱턴포스트에서 최초로 '매카시즘'이라는 말을 사용했어요. 매카시에게 비판적이었던 그는 매카시즘을 선동, 근거 없는 비방, 인신 공격 등으로 정의했죠. 매카시는 처음에는 이 단어를 불쾌하게 여겼지만, 나중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매카시즘의 의미를 바꿔 사용했습니다. 그는 "매카시즘은 공산주의와의 투쟁"이라며 "우리에게 더 많은 매카시즘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오펜하이머도 매카시즘 피해자
1950년 한반도에서는 6·25 전쟁이 일어났어요. 이념 대립이었던 이 전쟁은 매카시에게 날개를 달아 줬습니다. 전쟁 중이던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출신 아이젠하워가 당선됐어요. 아이젠하워는 후보 시절부터 매카시를 두둔하며 선거운동에 활용했어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고 초선 의원이었던 매카시는 정치 거물로 부상했죠. 매카시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한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정부 부처와 여러 기관을 샅샅이 뒤졌어요.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자 혐의로 조사받았고 청문회에도 소환됐어요.
매카시가 공산주의자로 지목한 사람은 하루아침에 명예와 지위를 잃었어요.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죠. 미국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한 천재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도 피해자였는데요. 과거 공산주의자와 교류한 사실과 핵 개발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소련에 우호적인 인사로 몰리게 됐습니다. 오펜하이머 청문회까지 열렸고, 원자력위원회는 오펜하이머가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했어요.
왜 당시 미국인들은 매카시의 말에 빠져들었을까요? 그는 숫자와 이름을 대거나 증언 일부를 인용하고 보고서 쪽수까지 댔다고 해요. 연설하거나 발언할 때마다 서류나 사진, 편지 등 자료를 '증거'로 제시했어요. 듣는 사람이 진짜같이 믿게 만드는 화법을 쓴 것이죠. 그는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언론은 무조건 좌파라고 몰아세우기도 했습니다.
진실이 밝혀지다
시간이 지나면서 매카시를 의심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공화당에서도 매카시를 비난하는 사람이 많아졌죠. 1954년 3월 미국 CBS 방송국에서 매카시즘이 허구라고 폭로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했어요. 사람들은 매카시가 뚜렷한 증거 없이 의혹을 부풀려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추락하던 매카시는 또 한 번의 폭로를 하게 됩니다. 이번엔 미국 육군 내부에 공산주의자들이 득실거린다는 것이었죠.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육군 출신 전쟁 영웅이었는데요. 아이젠하워는 이를 계기로 매카시를 내쳐버리게 돼요.
의회에선 매카시의 육군 관련 발언 청문회가 열렸어요. 상원의원들은 매카시에게 폭로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요구했죠. 증거 없이 변명으로 일관하는 매카시의 모습이 미국 전역에 방송됐습니다. 당시 청문회 TV 시청자가 2000만명에 달했다고 해요. 36일간 중계된 이 청문회에서 나온 발언 기록만 7300쪽에 달했어요. 청문회 전 조사에서 매카시에 반대하는 여론은 29%였으나 청문회가 끝난 다음에는 50%를 넘겼다고 해요.
의회는 같은 해 12월 매카시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이로써 매카시즘은 막을 내렸습니다. 매카시는 알코올 중독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1957년 48세 나이로 사망했죠. 이후로 매카시즘은 '이념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은 나라를 휘청거리게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낼 때 종종 인용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