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명화 돋보기] 닿을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애틋함… 화폭에 담았어요
입력 : 2026.02.02 03:30
고향을 담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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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지호의 1928년 작품 ‘동복산촌’입니다. 화가의 고향인 전남 화순 동복 마을의 풍경이에요. /리움미술관
전쟁 직후인 1950~1960년대 우리나라는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런 시기에 어렵게 미술 활동을 이어 갔던 화가들은 '살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지' 하고 기다리면서 고향 산천과 마을을 그리곤 했어요. 좋은 날이 오면 고향에서 어릴 적처럼 아무 근심 없이 살고 싶다는 염원을 가슴에 품고 말이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오는 22일까지 '향수, 고향을 그리다'라는 전시를 진행해요. 설날을 맞아 고향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는 전시입니다. 화가들의 고향은 어떤 곳이었는지 그림으로 둘러볼까요?
그늘에도 빛이 있는 고향
<작품 ①>은 화가 오지호(1905~1982)가 일제강점기에 그린 고향 풍경 '동복산촌'입니다. 전남 화순의 동복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오지호는 한국의 풍토를 살린 인상주의 풍경을 그린 화가예요. '동복산촌'을 보면 산속 흙길을 오가는 여인들과 초가집, 나무 등이 햇빛을 받고 있어요. 고향 마을의 평범한 일상을 소중하게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이 그림 속 고향은 살림살이가 넉넉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푸근한 인정과 온기가 있는 곳 같아요.
평소 오지호는 '그늘에도 빛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늘을 어두운 회색으로 처리하지 않고 여러 빛깔로 채워 넣은 그림을 즐겨 그렸습니다. 그의 이런 예술론은 삶에 대한 신념이기도 했어요. 고난 속에서도 삶은 암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밝고 희망적일 수 있다는 것이죠.
통영이 키워낸 화가
<작품 ②>는 통영이 고향인 화가 전혁림(1915~2010)이 그린 '통영 풍경'입니다. 전혁림은 집안이 가난해서 미술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독학으로 세계적인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나갔어요. 전혁림을 화가로 키워낸 스승은 오직 그의 고향 통영밖에 없었습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 그 위에 떠 있는 작은 배들, 비릿한 생선 냄새, 그리고 통영의 전통 공예품에서 찾아낸 아름다움을 화폭에 옮겼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혁림은 줄곧 가난했고 떠돌이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림을 알아봐 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그림을 그린 덕분에, 뒤늦게 대도시의 미술계 사람들이 그의 뛰어남을 발견하고 전시회를 열려고 줄지어 통영을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이미 전혁림이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였습니다. 다행히 그는 이후로도 30년 정도 활발하게 화가로 활동했고, 95세에 눈을 감기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답니다. 전혁림은 고향 통영을 떼어 놓고는 생각하기 어려워 '통영이 키워낸 화가'로 불리고 있지요.
갈 수 없는 고향
다시는 고향에 갈 수 없게 된 사람도 있어요. 북쪽에 고향을 둔 사람이 특히 그렇겠지요. <작품 ③>은 달이 은은하게 비치는 밤 풍경을 그린 윤중식의 '봄'입니다. 평안남도 평양 출신의 윤중식(1913~2012)은 6·25전쟁이 터지자 아내와 함께 어린 세 자녀를 데리고 남으로 피란하던 중 뒤따라오던 아내와 첫째 딸을 놓쳤어요. 그들과는 결국 영영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젖먹이 막내도 죽고 결국 아이 하나만 데리고 서울로 오게 됐죠.
윤중식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비둘기입니다. '봄'에도 중앙에 커다란 나뭇가지가 있고 그 위에 비둘기 두 마리가 앉아 있네요. 평양에서 정미소(방앗간)를 하던 윤중식의 집 근처엔 늘 비둘기가 있었대요. 당시 백 마리도 넘는 비둘기가 집 마당으로 날아들었다고 하는데, 작가는 비둘기들을 쫓아내는 대신 처마 밑에 둥지 만드는 것을 도와주고 예뻐해 줬답니다. 훗날 어른이 된 그에게 비둘기는 거리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으며 돌아다니는 평범한 새가 아니라,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특별한 추억을 의미했을 겁니다. 평화가 찾아오면 새처럼 훨훨 자유로이 날아서 고향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도 담겨 있지 않을까요.
<작품 ④>는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 해주에서 미술 공부를 했던 박돈(1928~2022)의 그림 '성지'입니다. 둥근 달이 뜬 밤하늘 아래 토끼 한 마리가 보이고, 그 옆에 소년이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쓸쓸히 피리를 불고 있어요. 저 멀리 달나라에 절구를 찧는 토끼가 살고 있다는 설화가 떠오릅니다. 피리 부는 소년도 어쩌면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환상 속 인물이 아닐까 싶어요.
현실에서는 찾아갈 수 없고 오직 꿈에서만 볼 수 있는 고향을 그린 장면일까요? 이북에서 보낸 소년 시절이 기억 속에 아득해져 슬퍼지는 향수(鄕愁·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심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설 명절을 앞두고 '고향에 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깨닫게 해주는 그림들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