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일제 탄광에 수몰된 희생자, 83년 만에 물 밖으로

입력 : 2026.01.22 03:30

조세이 해저 탄광 수몰 사고

최근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1942년 '일본 조세이(長生) 탄광 수몰(水沒·물속에 잠김)' 사고 관련 내용도 함께 논의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앞서 지난해 8월 수몰 사고 유해가 발견된 상태였는데, 이번에 한국과 일본 양국이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DNA(유전자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 감정을 추진하기로 했답니다. 도대체 1942년 조세이 탄광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다뤘던 걸까요?

조선인 136명 포함 183명 숨져

이 사고는 일본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 서남쪽 야마구치현 우베시 해안에 위치한 조세이 탄광에서 발생했습니다. 우베시는 석탄 덕분에 발전했는데, 당시 석탄은 '검은 다이아몬드'라 불릴 정도로 수익이 많이 나는 산업이었어요. 우베시에서 나는 석탄 중 70%가량이 해저 탄광에서 채굴됐습니다.

조세이 탄광은 1914년에 채굴을 시작한 해저 탄광이었어요. 전성기에는 탄광 안팎에서 약 1000명이 일했고 연간 16만t(톤)의 석탄을 채굴했습니다. 당시 우베에 있는 50여 탄광 중에서도 조세이 탄광은 노동자 중 조선인이 4분의 3이나 돼 '조선 탄광'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고 해요. 한반도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또 워낙 위험한 곳이다 보니 일본인들은 굳이 이곳에서 일하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인은 명목상으론 '모집'됐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강제로 끌려 온 징용 노동자였습니다. KBS '시사기획 창'의 취재에 따르면, 숙소 벽에는 '어머니 보고 싶어' '배가 고파' 같은 글자가 한글로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한 노동자는 편지에 포로 수용소 같은 곳에서 폭력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고 호소했습니다.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 30분쯤, 바다 밑으로 들어가는 갱도 입구에서 1㎞ 정도 떨어진 갱도 내부에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갱도란 광물을 캐기 위해 땅속을 판 갱(坑) 안에 사람이 드나들기 위해 뚫어 놓은 길을 말합니다. 이곳에서 갑자기 천장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쏟아졌던 거죠. 갱도는 물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총 183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전체의 136명(74%)이 조선인, 나머지 47명이 일본인이었습니다.

조세이 탄광 인근 바닷가에 수몰 사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이 줄지어 놓여있습니다. 바다 위로 탄광의 환기구 역할을 했던 콘크리트 기둥이 보이네요.
조세이 탄광 인근 바닷가에 수몰 사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이 줄지어 놓여있습니다. 바다 위로 탄광의 환기구 역할을 했던 콘크리트 기둥이 보이네요.
지난해 8월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희생자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견된 현장이에요.
지난해 8월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희생자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견된 현장이에요.
조세이 탄광 위치를 표시한 지도.
조세이 탄광 위치를 표시한 지도.
과거 운영 중인 조세이 탄광 모습.
/조세이 탄광의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홈페이지
과거 운영 중인 조세이 탄광 모습. /조세이 탄광의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홈페이지
무리한 불법 채굴로 사고 발생

왜 이런 사고가 일어난 것일까요? 해저에 있던 이 탄광에서 해저면(바다의 밑바닥)과 너무 가까운 곳에서 채굴 작업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해요. 탄광이 바닷물과 가까워지면 바닷물이 침투할 가능성이 커져 매우 위험한 상황이 됩니다. 당시 일본법은 해저면으로부터 최소한 47m 깊은 곳에서만 채굴 작업을 할 수 있다고 정했어요. 그러나 이 탄광 갱도의 천장은 해저면과 불과 37m 떨어진 상태였죠. 갱도에서 천장 위로 지나가는 배의 엔진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 천장이 워낙 낮아 앉거나 누워서 채굴 작업을 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이때는 1941년 12월 8일(현지 시각으로는 7일)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직후였어요. 석탄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수 물자 중에서도 중요한 물품이었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깊이 파지 않은 갱도에서 '불법 채굴'이 이뤄졌던 겁니다.

그런데 사고 직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생존자를 구조해야 할 탄광 회사가 2차 사고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갱도 입구를 서둘러 폐쇄해 버렸던 거죠. 간신히 살아남은 인부들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됐답니다. 많은 사람이 현재까지도 '얼마나 갱도 속에서 살려고 발버둥 쳤을까'라고 안타까워하는 이유입니다. 당시 한 일본 신문은 '배수 작업 등 응급 조치를 취해 갱도에 있던 인부 대부분을 구조했다'는 오보를 내기도 했어요. 지금도 이곳 바다에는 탄광의 환기구 역할을 하던 콘크리트 기둥 두 개가 고스란히 남아 당시의 아픔을 전하고 있습니다.

83년 만에 바다에서 나온 희생자

오래도록 잊혔던 이 사고의 진상을 밝히자는 움직임은 일본 시민 단체에서 시작됐습니다. 1991년 '조세이 탄광의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 설립된 거죠. 이 무렵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과 나이, 주소 등이 적힌 조선인 희생자 명부도 발견돼 한국의 유족에게 늦은 사망 소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답장이 17통 왔다고 해요. 1992년 한국에도 '조세이 탄광 희생자 대한민국 유족회'가 생겨났습니다.

2007년 한국 정부의 산하 기관인 '일제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는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에 대해 조사를 벌였습니다. 2013년 일본 시민 단체는 시민 성금으로 탄광 근처 가정집을 매입해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희생자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이후 일본 정부를 상대로 "갱도 입구를 열고 희생자 시신을 수습해야 한다"는 요구도 일어났죠.

2024년 9월 25일, 폐쇄된 뒤 매몰돼 있던 조세이 탄광의 갱도 입구가 82년 만에 발견됐습니다. 시민 단체 측에서 굴착기로 끈질기게 땅을 파낸 결과였죠. 갱도 입구는 가로 2.2m, 높이 2.6m 규모로 확인됐어요. 지난해 4월 한·일 양국의 잠수부가 유해 수습을 위해 조사했으나 물이 탁해 쉽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지난해 8월 25~26일 희생자로 보이는 두개골 등 인골이 발견됐어요. 그 근처에 장화 3켤레가 보였고, 옷을 입고 누워 있는 듯한 물체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한국 시민단체 '장생(조세이) 탄광 희생자 귀향 추진단'은 "양국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83년을 해저에서 기다리던 유골을 물 밖으로 모셨다"며 "이제 양국 정부가 나서길 촉구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정상회담에선 드디어 양국 정부가 이 요구에 대해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 강제 동원돼 숨진 한국인 희생자는 1만997명이며, 이 중 정부 교섭을 통해 유해가 봉환된 경우는 21.9%(2024년 말 기준)에 불과합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기획·구성=정해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