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송나라부터 이슬람까지… 세계인 오가던 고려 무역항

입력 : 2026.01.08 03:30

벽란도

조선 후기 제작된 ‘해동지도’의 일부분. 원으로 표시한 부분은 왼쪽부터 벽란도, 송도(松都·개성), 경도(京都·한양)입니다. /국가유산청
조선 후기 제작된 ‘해동지도’의 일부분. 원으로 표시한 부분은 왼쪽부터 벽란도, 송도(松都·개성), 경도(京都·한양)입니다. /국가유산청
중국을 국빈 방문한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5일 베이징의 한중 비즈니스 포럼에 참석해 "오늘날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할 지점이 벽란도 정신"이라고 말했어요. 이 대통령은 "고려와 송나라가 외교적 긴장과 갈등이 있었던 시기에도 벽란도를 통한 교역은 중단되지 않았다"고 했어요. 한중 관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더라도 교류와 교역을 중단해선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됐어요. 그런데 '벽란도'가 도대체 뭘까요?


섬이 아니라 항구 이름

벽란도(碧瀾渡)는 섬 이름이 아닙니다. '도(渡)' 자에는 '(물을) 건너다'와 '나루터'라는 뜻이 있는데 여기선 후자의 의미입니다. 고려 시대 예성강 하류에 있던 나루터였는데,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바다로 통하는 입구 같은 지점이라 국제 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했던 곳이에요. 수심이 깊어 밀물을 이용해 여러 배가 오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를 방문하는 외교 사절단 역시 배를 타고 벽란도에 내렸죠. 육로로 개경에 오더라도 이 근처를 지나갔다고 해요.

지금은 휴전선 북쪽 개성시 개풍구역 신서리와 황해남도 배천군 문산리에 해당합니다. 사실 서울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죠. 벽란도는 고려 건국 때부터 중요한 지점이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의 집안이 개경을 근거지로 삼아 벽란도를 통해 해상 무역을 하던 호족이었습니다.

벽란도의 '벽란'은 '푸른 물결'이란 뜻인데요. 이 근처 언덕에 '벽란정'이라는 관사가 있어 외국 사신이 묵고 갔다고 합니다. 벽란도는 처음에는 '예성항'이었는데, 이후 벽란정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바뀐 거라고 하네요.

고려를 방문한 중국 송(宋)나라 사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고려도경'을 쓴 서긍이에요. 1123년(인종 1년) 고려에 왔던 서긍은 뱃길로 벽란도에 도착했는데, 기다리고 있던 고려 군사들이 징과 북을 울리며 그들을 맞이했다고 해요. 사신들이 쉬려고 벽란정으로 안내받는 동안 그들을 구경하는 사람이 만 명쯤 될 정도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사신들은 다음 날 육로로 개경의 서대문인 선의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동남아·인도·아라비아 상인도 찾아와

왜 중국에서 육로로 오지 않고 바닷길을 통해 벽란도로 와야 했을까요? 중국의 한족(漢族) 왕조인 송나라는 당(唐)나라 다음의 오대십국을 이은 통일 왕조였어요. 송나라는 문치(文治)가 발달한 반면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약해 거란족과 여진족 같은 북방 민족에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와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가 중국 북쪽 지역에 세력을 뻗쳤기 때문에 송나라는 고려와 국경을 접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바다가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벽란도에서 고려와 무역 활동을 한 나라가 송나라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일본은 물론이고, 교지국(베트남), 섬라곡국(태국), 마팔국(인도 남부의 이슬람 왕국) 상인들도 벽란도를 찾아 교역을 했어요. 서긍의 기록에서 보듯 이곳엔 '만 명'이라 표현될 만큼 수많은 사람이 오갔던 것입니다.

심지어 아라비아 반도와 지금의 이란·이라크·북아프리카가 영역이었던 대식국(아바스 왕조)의 상인들도 벽란도에 왔죠. 외국에서 우리나라를 '코리아'라고 부르는 것도 이들을 통해 고려라는 나라 이름이 외국에 알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조선 초인 1418년 세종대왕의 즉위식에 '회회(回回·아라비아) 노인'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아마도 고려 말 벽란도를 통해 입국했을 것입니다.


바닷길 막히면서 벽란도 무역 침체

그러나 이렇게 번성했던 벽란도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개국한 뒤 점차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다만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로 남게 됐죠. 왜 그랬을까요? 우선 수도가 개경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바뀌었으니 개경 근처인 벽란도에선 무역이 침체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어요. 조선 시대에는 국제적인 해상 무역 자체가 쇠퇴했던 것입니다. 우선 중국을 더 이상 바닷길로 갈 필요가 없었어요. 몽골족의 원(元)나라를 밀어내고 새롭게 일어난 한족의 명(明)나라는 송나라와는 달리 조선과 국경을 맞닿게 됐죠. 더구나 1421년(세종 3년) 명나라의 영락제는 수도를 난징(남경)에서 조선과 가까운 베이징(북경)으로 옮겼습니다. 이 무렵부터는 양국 사신이 육로로 왕래했습니다. 육로로 가는 것이 바닷길보다 훨씬 안전했기 때문에 당시 사신들은 대부분 기뻐했다고 해요.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는 강력한 해금(海禁) 정책을 취했습니다. 주민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일을 금지한 것이죠. 해양 세력을 억제하고 왜구의 침공에 대비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민간의 사(私)무역도 막혔습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조선 역시 초기부터 해금 정책을 펼쳤고, 울릉도 등 먼 섬의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공도(空島) 정책까지 실행했습니다. 중국과의 조공 무역 외에 다른 여러 나라와의 무역은 크게 쇠락했죠. 고려와 비교해 볼 때, 조선 왕조는 처음부터 쇄국 정책을 벌인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진정한 '벽란도 정신'은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가 중국과 관계를 호전시키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이를 위해 '벽란도 정신'을 주목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벽란도가 쇠퇴한 이유는 중국과 관계가 나빠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외교와 국제 무역에서 중국과의 관계만 강화된 반면 다른 나라와의 관계가 약화돼 버린 결과였습니다. 중국 이외의 다양한 여러 국가들과도 늘 원활하고 활발한 관계를 유지해야 진정한 '벽란도 정신'이 살아날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나치게 가깝고, 지나치게 큰 나라'인 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으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대상입니다. '셰셰(감사합니다)'만 외칠 게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기획·구성=정해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