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변신 앞둔 '고터'… 첫 임무는 '강북 인구 분산'이었대요

입력 : 2025.12.04 03:30

고속터미널

1976년 9월 1일, 서울 고속터미널 공사가 1차로 마무리된 모습이에요. 제대로 된 건물은 아직 없고 승차장만 덩그러니 있어요. 당시 강남은 서울에서 한적한 변두리여서, 터미널 주변에도 높은 건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서울기록원
1976년 9월 1일, 서울 고속터미널 공사가 1차로 마무리된 모습이에요. 제대로 된 건물은 아직 없고 승차장만 덩그러니 있어요. 당시 강남은 서울에서 한적한 변두리여서, 터미널 주변에도 높은 건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서울기록원
서울시가 서초구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을 재개발하기 위해 관련 업체들과 협상을 시작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오래돼 낡은 버스터미널을 지하로 통합하고, 지상엔 최고 60층 빌딩을 지어 글로벌 시대에 여러 사람이 모여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중심지를 만들겠다는 거예요.

아직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지만, 실행된다면 강남 한복판에 있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 들어선 지 반세기 만에 환골탈태(換骨奪胎·낡은 것을 완전히 새롭게 바꿈)의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강남 터미널' '반포 터미널'로도 불렸고 지금은 줄임말로 '고터'라고도 불리는 이 건물은 서울의 도시계획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곱 곳에 흩어져 있던 서울의 고속터미널

1970년 총길이 428㎞(지금은 직선화 등으로 416㎞)의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한 뒤 전국은 '1일 생활권'이 됐고 본격적인 자동차 시대가 열렸어요. 1973년엔 호남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 1975년 영동·동해고속도로가 개통됐죠. 당시엔 자동차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고속버스는 그야말로 씽씽 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려면 어디로 가야 했을까요? 1974년까지도 버스 업체별로 중구 봉래동·도동, 종로구 관철동 등 무려 일곱 곳에 터미널이 흩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시설은 열악한 편이었고, 남대문로와 을지로 터미널은 대합실조차 없어 비가 오면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서 있어야 했어요. 그중 가장 큰 곳이 6개 업체가 사용하던 동대문 터미널(현 JW 메리어트 자리)이었는데, 1968년까지 전차 차고지로 쓰던 곳이었습니다.

고속버스터미널을 통합하려던 서울시는 처음엔 '세계의 고속터미널은 대개 도심부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서울역 가까운 곳에 새 터미널을 만들려 했어요. 당시 서울역 북쪽에 중앙도매시장이 있었는데, 중앙도매시장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전이 결정돼 있었습니다. 서울시는 이곳에 고속버스터미널을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고, 땅 확보를 위해 공원을 지었어요.(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하지만 그 계획과 달리 그곳은 지금도 '서소문역사공원'으로 남아 있습니다. 터미널이 다른 데 들어선 것이죠. 어떻게 된 걸까요?


'인구 분산' 위해 벌판에 들어서

서울시의 계획이 무산된 것은 '강남(한강 남쪽) 개발'이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중반만 해도 지금의 강남·서초구는 한적한 변두리였어요. '영등포 동쪽'이란 뜻의 '영동'으로도 불렸죠. 박정희 대통령은 "너무 많은 서울 강북의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1975년 당시 구자춘 서울시장은 '서초구 반포동 19번지 5만 평의 빈 땅에 대규모 종합터미널을 건설한다'는 방침을 확정했습니다. 북쪽에 작은 시냇물이 흘러 여름이면 쉽게 침수되는 땅이었지만, 강남을 빠르게 키울 수도 있었고 경부고속도로와 아주 가까운 곳이기도 했습니다. 구 시장의 강한 추진력에 업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1976년 9월 1일 강남 고속터미널 공사가 1차로 끝났는데(1차 준공), 제대로 된 건물도 없이 사실상 승차장뿐이었습니다. 아직 서울 이용객의 절대다수는 강북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적은 공사비로 부랴부랴 만든 한강 다리가 잠수교였습니다. 1978년엔 강북의 남산을 관통하는 남산 3호 터널도 뚫렸죠. 그래도 여전히 고속터미널로 가려면 교통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시내버스는 원활하지 않았고 택시는 합승을 강요하기 일쑤였습니다. 언론에선 '지방 손님 실어다 벌판에 쏟는 서울 관문'이란 비판을 하기도 했죠.

고속터미널의 교통 문제를 보면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반포에 터미널을 만들겠다고 결정할 무렵 지하철 2호선 노선도 거의 결정돼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2호선은 고속터미널을 지나지 않았어요. 이 문제는 1985년 개통한 지하철 3호선이 고속터미널을 지나면서 비로소 해결됐지만, 3호선이 신사동에서 양재동 쪽으로 직진하지 않고 크게 돌아가도록 만들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무렵엔 강남 개발도 어느 정도 이뤄져 강남에 살면서 고속버스를 타는 사람도 많아지게 됐죠. 지금은 7호선과 9호선까지 세 개 지하철 노선이 고속터미널을 지나고 있어요.


경부선·호남선 건물의 엇갈린 역사

고속터미널 중 지금의 경부선 건물이 완공된 것은 1981년의 일이었어요. 콘크리트 피라미드 형태의 웅장한 11층 건물로, 처음엔 3층과 5층에도 승하차장이 있었어요. 서울이 고향인 필자의 기억으론 1980년대 중반까지도 1층과 지하에 헌책방이 많았고, 시골에서 올라온 듯한 갓 쓴 어르신도 종종 볼 수 있었어요. 건물 앞 광장에선 약장수들이 맨손으로 돌멩이를 깨는 차력 쇼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최근 들어선 겨울이 되면 그 광장에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지기도 했죠.

그 서쪽에 호남선 터미널로 쓸 20층 건물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터미널을 맡아 운영하던 회사가 망하면서 임시로 지었던 2층짜리 초라한 가건물이 오래도록 호남선 터미널 역할을 했습니다. 옆의 커다란 경부선 건물과 비교돼 사람들은 '영·호남 지역 차별'의 상징적인 모습처럼 여겼다고 해요. 하지만 2000년 이곳에 33층 높이의 센트럴시티 건물이 들어서면서 호남선이 경부선을 '역전'한 모습이 됐습니다.

처음엔 고속터미널이 시외버스터미널 역할도 했지만 교통이 혼잡해지자 시외버스터미널 기능은 서초동으로 이전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서울남부터미널입니다. 1987년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광진구 구의동에 동서울종합터미널이 들어서면서 강남에 있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의 역할을 일부 나눠가졌습니다.

생겨난 지 50년이 된 강남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은 하루 4000대에 이르는 대형 버스가 오가면서 교통 체증, 대기 오염, 소음 문제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주차 공간이 절반 이상을 차지해 걸어다니기 불편한 구조가 됐기도 하죠. 이번 개발 계획이 이런 문제들을 과연 어느 정도까지 해결할 수 있을지도 관심이 가는 부분입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정해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