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사소한 역사]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의 보물' 다른 색의 흙 채워 화려함 더했죠

입력 : 2025.11.18 03:30

고려청자

지난 10일 국가유산청 국립해양유산연구소는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고려 시대 난파선 흔적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고려청자 87점이 발굴됐다고 밝혔어요. 지난 15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는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이 국가에 기증한 우리나라 문화유산과 미술 작품 330여 점 특별 전시가 열렸는데, 여기에 국보인 고려청자가 포함돼 눈길을 끌었죠. 과연 고려청자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나라 대표 문화유산이 됐을까요?

국보 청자 동화 연화문 표주박 모양 주전자. 표주박 모양 몸통에 연잎을 둘러싼 장식의 고려청자예요. 이번에 미국에서 전시됐어요.
/국가유산청
국보 청자 동화 연화문 표주박 모양 주전자. 표주박 모양 몸통에 연잎을 둘러싼 장식의 고려청자예요. 이번에 미국에서 전시됐어요. /국가유산청
청자는 푸른빛을 띠는 도자기예요. 도자기는 토기가 발전한 형태로, 둘 다 흙을 빚어 만들지만 도자기는 토기보다 높은 온도에서 구워요. 불 온도가 높아질수록 그릇은 단단해지고, 강한 불길 속에서는 재 성분이 그릇 표면에 얇은 유리막을 만들기도 합니다. 옛사람들은 이 효과를 내기 위해 재를 물에 풀어 만든 잿물(회유)을 토기에 발랐어요. 이렇게 만든 토기를 회유토기라고 부르며, 이 기술이 점차 발전해 청자가 등장합니다. 중국은 상(商) 왕조 때 회유토기가 등장했고, 당나라 말 더 단단하고 푸른 청자를 만들 수 있게 됐어요.

우리나라는 가야와 신라의 토기가 우수했습니다. 가야 토기는 일본 토기 문화에 영향을 줬고, 신라는 삼국 통일 이후 통일신라 시기에 토기 기술이 도자기 단계로 점차 발전했어요. 그런데 통일신라 후반에 왕권이 약해지며 지방에서 권력을 잡은 호족이 등장합니다. 이때 해상무역도 활발해져 장보고처럼 당나라와 직접 교류하는 호족까지 나타났죠. 그러면서 당나라 청자가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후 고려 시대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자체적인 청자 제작 기술이 발전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 방법을 따랐지만, 점차 고려만의 기술이 뚜렷해졌어요. 고려 중기에는 상감 기법으로 만든 고려만의 독자적인 상감청자가 발달합니다. 상감 기법은 표면을 얇게 파내고, 그 자리에 다른 색의 흙을 채워 넣어 문양을 만드는 방식이에요.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고려청자 대부분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답니다.

하지만 1170년 무신정변으로 고려 사회가 큰 혼란에 빠지자 청자를 굽던 가마들도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어려워졌습니다. 이어 몽골의 침입과 원나라의 정치 간섭, 일본 해적(왜구)의 약탈까지 겹치며 제작 환경은 더욱 나빠졌어요.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 백자가 대표적 도자기로 자리 잡으면서 청자 생산이 점차 줄었고 결국 청자는 더 귀해졌어요. 대한제국 시기 일본인들이 도굴한 고려청자가 창경궁 안 박물관에 전시됐을 때, 고종이 이 도자기가 어느 나라 것인지 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것"이라고 답하자, 고종이 "우리나라에는 이런 그릇이 없다"며 놀랐다는 이야기죠. 고려청자를 보기 어려웠던 조선 말 분위기를 보여주는 일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현철 서울 영동고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