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황금으로 빛나는 '왕권의 상징'… 사실 은도 섞었대요

입력 : 2025.11.13 03:30

신라 금관

관람객들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 특별 전시를 보고 있는 모습. /김동환 기자
관람객들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 특별 전시를 보고 있는 모습. /김동환 기자
토요일이었던 지난 8일 오전 5시 13분, 필자는 서울역에서 경주역으로 가장 일찍 떠나는 KTX 열차를 탔습니다. 경주역에서 택시를 타고 국립경주박물관에 도착한 시각이 오전 7시 40분. "아니, 이 시간에 여기 주차장이 만차인 건 처음 봐요!" 택시 기사의 탄성을 듣고 헐레벌떡 내려보니 이미 박물관 정문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습니다.

줄 맨 앞에 서 있던 분에게 물어보니 "새벽 4시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고 하더군요. 대기 줄에는 간이 의자나 돗자리, 담요를 준비한 사람도 많았어요. 세어 보니 저는 180번째쯤 되더라고요. 그러는 사이 수백 명이 또 제 뒤로 줄을 섰습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 '황금빛 물결'

도대체 무슨 줄이었냐면요, 다음 달 14일까지 계속되는 이 박물관의 특별 전시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전(展)을 보기 위한 인파였습니다. 지난 1일 끝난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 회의와 국립경주박물관 개관 80주년을 맞아 선보이는 전시인데, 신라의 대표적 금관 6점이 처음으로 한데 모인 데다 이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 각국 정상이 신라 금관에 대해 호평을 했다는 소문이 난 상황이었죠. 오전 9시 20분이 되자 위조 방지용 도장이 찍힌 입장권을 무료로 나눠 줬는데, 이런 대기표 발급은 이 박물관이 문을 연 이래 처음이라고 해요. 입장한 시각은 오전 10시 20분, 박물관 도착 약 160분 만에 '신라 금관'전 전시실에 들어갔습니다.

관람객들은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는 듯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여섯 개가 다 모인 신라 금관은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5세기 전반의 '교동 금관'은 신라 금관의 원형을 간직해 단아해 보였고, 5세기 중엽의 '황남대총 금관'과 5세기 후반의 '금관총 금관'은 산(山) 자 모양과 사슴뿔, 곱은옥(옥을 굽은 형태로 가공한 것) 장식이 돋보였습니다. 6세기 전반의 '서봉총 금관' '금령총 금관' '천마총 금관'은 조금씩 다른 세부 묘사로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금령총 금관은 곱은옥 대신 달린 금령(금방울)이 찬란했죠.


금관 주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아

신라 임금들에겐 왜 금관이 필요했을까요? 서기 382년 신라는 임금의 호칭을 '가장 높은 지위'라는 뜻인 '마립간(麻立干)'으로 바꿨습니다. 신성한 권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가장 귀한 재료인 황금에 주목했습니다.

신라 무덤에서 처음으로 금관이 발견된 곳은 1921년 금관총이었습니다. 죽은 자의 온몸을 금관과 금귀고리, 금팔찌, 금반지, 금허리띠, 금신발 같은 황금 장신구로 장식하며 죽은 뒤에도 권력과 부가 계속되길 바랐던 것이죠. 이처럼 이승의 삶이 저승에서도 이어진다고 믿었던 신라인의 관념을 계세사상(繼世思想)이라고 합니다. 왕뿐 아니라 왕비도 금관을 쓸 수 있었는데, 황남대총과 서봉총 금관은 왕비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교동 금관의 주인은 어린아이로 보인다고 하네요. 다만 금관 6점 모두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금관총 금관의 경우 '이사지왕'의 것으로 확인됐지만, 이사지왕은 기록에 등장하지 않아 실제로 어떤 인물인지는 분명하지 않답니다.


알고 보니 '100% 순금'은 아니라고?

이렇듯 눈부시게 빛나는 신라 금관은 사실 100% 순금은 아니라고 합니다. 금에 은(10~19%)을 섞어 만든 합금이라는 거예요. 금 비율은 서봉총 금관이 80.3%, 교동 금관이 89.2% 정도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순금은 지나치게 무르고 쉽게 휘어지기 때문에 은을 섞어 강도를 보강했다고 해요. 후대로 갈수록 금관이 커지고 무게가 늘어나면서 위아래로 눌리는 힘에 견디는 강도를 높이기 위해 금 함량도 낮아졌습니다.

흔히 '사슴뿔 모양 장식'이라 불리는 신라 금관의 휘어진 듯한 장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일부는 "줄기마다 어긋나게 뻗어 있는 모습이 사슴뿔과는 다르고, 산(山) 자 장식처럼 나뭇가지 모양인 것으로 보인다"고 해요.

금관과 금허리띠를 비롯해 신라 무덤에서 나온 황금의 양은 어마어마한데요. 어디에서 온 걸까요? 경주 근처에 금광이 있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어요. 봉화·상주·성주 등 조금 먼 경북 내륙에서 금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의 유물인 가야 금관도 출토됐지만, 신라 금관이 훨씬 화려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백제에서는 금으로 만든 왕관 장식(관식)은 나왔지만 금관은 나오지 않았고, 고구려 금관일 가능성이 있는 유물도 있지만 아직 진위 여부가 불확실해요.


왕의 권위 높아지자 금관도 사라졌죠

신라 왕들이 일상에서 실제로 금관을 착용한 것은 아니고, 무덤에 넣는 용도였다는 견해는 지금까지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사극 드라마·영화에서만 화려함을 드러내려고 쓰고 나온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최근엔 '실제로 썼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습니다. 제사 같은 특별한 행사에서 착용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실제로 쓸 게 아니면 왜 은의 함량을 높여 더 단단하게 만들었겠으며, 서봉총 금관처럼 금관 안에 둥근 모자를 만들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극이 틀린 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돼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6세기 중반이 되면서 왕의 권위가 마립간 시절보다 커졌고, 무덤을 크게 짓는 대신 시신을 화장하는 등 불교식 장례 풍습으로 바뀌면서 금관은 점차 사라졌다고 합니다. 금관이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면, 실제로 권위와 권력을 충분히 갖춘 임금은 더 이상 황금이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았던 셈이죠. 따라서 7세기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서 신라 임금이 금관을 쓰고 있는 설정은 실제와는 맞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선덕여왕을 떠올릴 때 금관을 쓴 모습을 상상하게 되고 사극에서도 그렇게 묘사됐지만, 아쉽게도 선덕여왕은 7세기 군주였습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기획·구성=정해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