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올해 100년째 인구조사… 1000억 넘게 들여 하는 이유는

입력 : 2025.11.06 03:30

인구주택총조사

현재 우리나라에는 총 몇 명이 살고 있을까요? 아마 쉽게 대답하기 어려울 거예요. 정확한 인구를 알기 위해 우리나라는 5년에 한 번씩 '인구주택총조사'를 합니다. 지금 전국에서 이 조사가 진행되고 있지요. 조사 인력만 3만1000명이 투입되고, 비용도 1146억원이나 드는 대규모 조사입니다.

인구는 국가의 주요 정책을 만드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자료입니다. 우리나라의 인구주택총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시작돼 올해로 딱 100년을 맞았는데요. 최근엔 단순히 인구수만 세지는 않는답니다. 결혼 계획 및 의향, 돌봄 시간 등 55항목에 걸쳐 개개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조사하죠. 이런 질문들은 전체 가구 중 20%의 표본 가구를 선정해 물어본답니다. 나라의 국력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국민이 열심히 일하고 낸 세금이 국가의 재정이 되고, 국민의 수가 곧 군대의 규모가 되지요. 그래서 인구를 파악하는 일은 과거부터 아주 중요한 일이었답니다.

1960년 ‘인구주택국세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 인구, 가구, 주택 부분 36개 항목을 조사했다고 해요.
1960년 ‘인구주택국세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 인구, 가구, 주택 부분 36개 항목을 조사했다고 해요.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진행된 ‘국세조사’ 홍보 포스터예요. 당시 인구조사 역할을 했는데, 포스터 왼편에 ‘사실대로 써라 국세조사’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요.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진행된 ‘국세조사’ 홍보 포스터예요. 당시 인구조사 역할을 했는데, 포스터 왼편에 ‘사실대로 써라 국세조사’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요.
조선 시대에 작성된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현 주민들의 호적대장. 집주인과 가족의 이름·나이뿐 아니라 노비에 관한 내용도 담고 있어요.
조선 시대에 작성된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현 주민들의 호적대장. 집주인과 가족의 이름·나이뿐 아니라 노비에 관한 내용도 담고 있어요.
올해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새로 추가된 문항이에요. 조사마다 문항 개수와 내용이 조금씩 달라진답니다.
/국가기록원·국가유산청
올해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새로 추가된 문항이에요. 조사마다 문항 개수와 내용이 조금씩 달라진답니다. /국가기록원·국가유산청
조선 시대에는 의례적 성격 강해

조선 시대에는 3년(식년)에 한 번 인구 상황을 조사하고 이를 기록한 호적(戶籍)을 만드는 작업을 했어요. 조선 시대의 호적은 가장을 중심으로 기록됐는데, 때로 노비가 추가되기도 했습니다. 호적에는 다양한 기록이 남았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노비가 도망가는 경우에도 기록에 남겼지요. 그래서 조선 시대의 호적은 인구를 기록하는 것 외에도, 신분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재판 때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조선 시대엔 전국의 호구 수와 남녀별 인구수를 적은 기록을 왕에게 전달하는 '헌민수(獻民數)'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는 곧 왕의 통치를 상징하는 의례였지요.

하지만 조선 시대의 인구조사에는 빈틈도 많았습니다. 우선 영아 사망률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아예 기록이 되지 않은 아이가 많았지요. 게다가 교통이 불편하고 행정이 느려, 오늘날처럼 지방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현재 기록된 조선 시대의 인구 자료는 실제 인구의 절반에도 못 미쳤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는 조선이 미개해서라기보다는, 인구조사가 실제 행정 운영과 직접 연결되지 않고 형식적·의례적인 성격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또 정확성보다는 편의가 우선이 된 것이지요.

1925년 일제강점기 때 첫 정기 인구조사

근대가 시작되자, 분위기는 바뀌었습니다. 나라 밖에서 쏟아져 들어온 계몽의 물결은 '국력을 알려면 인구를 알아야 한다'는 인식을 퍼뜨렸습니다. 1896년 5월 30일 자 독립신문 논설에서는 인구조사의 후진성을 크게 비난했지요. "조선 사람들이 자기 나라가 얼마나 큰지, 나라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몇이 태어나고 몇이 죽는지, 도무지 자세히들 모르니… 그 어찌 한심치 않으리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정확한 통계가 국가와 사회의 진보를 나타낸다고 여겨졌죠. 따라서 국가의 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몹시 중요했습니다. 치안을 유지하고, 행정 자료를 작성해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인구는 가장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정보입니다. 그래서 일제는 1925년부터 5년마다 정기 인구조사를 시행했습니다. 당시 인구는 1952만명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인구조사는 실제 인구가 대부분 파악된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는 이런 결과를 근대화의 상징으로 보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어린아이들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 경향은 강하게 나타나, 당시 식민지 조선의 영아 사망률은 세계적으로 낮은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이것이 근대 국가의 힘"이라며 선전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1930년대 울산 지역 조사에 따르면 영아사망률은 12%에 달했습니다. 인구 기록에 반영되지 않아 영아 사망률이 낮아 보인 것입니다.

이후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더 큰 혼란이 오게 됩니다. 전쟁 와중에 엄청난 인구가 남과 북을 오갔기 때문에 현황을 다시 파악해야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에 대대적인 '총인구조사'가 있었습니다. 정부가 인적 자원을 파악하기 위한 인구조사였습니다. 이때 정부는 지역 사정을 잘 아는 공무원들을 교육시켜 조사원으로 파견했습니다. 직업, 학력, 주거, 장애 여부 등도 파악하려고 했지요. 결국 인구조사의 역사는 국가가 개인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좀 더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려고 한 과정입니다. 이렇게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정부는 사회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할 수 있게 되지요.

'가구 내 사용 언어' '한국어 실력' 문항도 있죠

1960년대 차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거지가 불안정해졌고, 부랑인도 크게 늘어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정확한 인구조사에도 어려움이 생긴 것이지요. 무엇보다 당시엔 인구조사에 대한 국민의 반감도 컸습니다. 식민지 시기의 경험을 통해, 국민은 자신의 정보를 정확하게 신고했다가 혹시 모를 세금이나 의무를 지게 될 수 있다는 걱정이 있었지요. 하지만 당시 한국 사회는 불안했습니다. 북한과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군사적 위기감이 있었고, 경제 상황도 어려웠습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국민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었죠. 그래서 나온 것이 1962년 '주민등록제도'입니다. 국민의 주소와 거주지를 등록해 사람들의 거주·이동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한 것이었어요. 주민등록제도는 인구조사를 정확하게 뒷받침하는 핵심 기반이 됐죠.

올해 인구조사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난 후 첫 대규모 조사라는 점에서 특별한데요. 문항을 살펴보면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답니다. 1990년 45개였던 조사 항목이 올해 55개까지 늘어났는데, 물어보는 내용도 바뀌었습니다. 올해 조사에서는 다문화 가정 및 외국인을 대상으로 '가구 내 사용 언어'와 '한국어 실력' 등을 묻는 문항이 추가됐죠. '가구주와의 관계' 항목엔 '비혼 동거' 항목도 새로 생겼습니다.
이한 작가·'한잔 술에 담긴 조선' 저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