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사과와 침묵 사이, 한일 관계의 길목에 섰던 日 총리들
입력 : 2025.11.05 03:30
일본의 총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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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년 한국의 이동원(앞줄 왼쪽 첫번째) 외무장관과 일본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상(앞줄 왼쪽 네번째)이 참석한 가운데 양국 대표가 한일기본조약에 서명하고 있어요. /조선일보DB
수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본 총리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한일 관계의 변곡점을 만들어 왔답니다. 오늘은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된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한일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 총리들에 대해 알아볼까요?
현실 외교의 출발
1960년대 일본은 경제 성장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어요.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사토 에이사쿠(재임 1964~1972) 총리입니다. 그는 이념보다 현실을 우선하며 전후 일본의 경제 성장과 외교 복원을 이끌었죠.
당시 한국은 산업화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과거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갖고 있었지만, 경제 성장을 위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동북아 안정을 위해 한일 양국의 화해를 적극적으로 중재했죠.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체결된 게 1965년 '한일기본조약'입니다. 양국의 끊어진 관계를 다시 정상화한 이 조약이 맺어지기 전까지 900회가 넘는 회담이 있었다고 해요. 일본은 10년에 걸쳐 한국에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의 자금을 제공하기로 했고, 양국은 식민 지배 기간과 전쟁 중 발생한 피해 보상 문제에 대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한다"고 합의했어요.
이 조약은 단순히 '국교를 정상화했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냉전 속에서 미국이 주도한 동맹 구도의 재편, 한국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자금 확보, 그리고 식민지 지배의 역사 문제를 덮어둔 정치적 타협이 모두 이 조약 안에 얽혀 있었어요.
한일기본조약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후 수십 년 동안 한일 관계를 뒤흔들 역사 분쟁의 불씨를 남겼지요.
'무라야마 담화'와 사죄의 시작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에도 한국 안에서는 "식민지 지배 사과도 없고, 보상 또한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커져 갔어요. 그런 가운데 한일 관계의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이 바로 무라야마 도미이치(1994~1996) 총리였습니다. 오늘날 일본의 사죄를 상징하는 '무라야마 담화'를 내놓은 인물이죠.
"아시아 여러 나라 국민에게 막대한 피해와 고통을 끼쳤다.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한다." 1995년 8월 15일, 종전 50주년을 맞아 무라야마 총리는 이런 담화문을 발표합니다. 일본 총리로서 처음으로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힌 것이었죠. 이 발언은 각료들의 동의를 거쳐 발표한 공식 담화였고, 이후 일본 총리들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며 일본 정부의 기본 입장으로 삼았습니다. 물론 일부 총리는 말로만 계승을 내세운 채 실질적으로는 담화의 정신에서 멀어진 행보를 보이기도 했죠.
문화 교류 늘리며 한일 협력 본격화
오부치 게이조(1998~2000) 총리는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발표했어요. 오부치 총리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며 일본이 한국에 준 피해에 대해 사죄한다고 말했죠. 이에 김대중 대통령은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어가자"고 화답했습니다.
이 선언은 단순히 사과에 머물지 않았어요. 양국은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하기로 합의했고,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를 계기로 양국 국민의 교류를 늘리자는 구체적 약속도 담았죠. 변화는 곧 문화 분야에서 크게 나타났어요. 그동안 금지돼 있던 일본 영화·음악·만화가 단계적으로 개방되면서, 한국 젊은 세대는 일본 문화를 직접 접하게 되었죠. 반대로 일본에서는 한국 드라마와 가수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며 '한류'의 첫 물결이 시작됐어요. 오부치 내각의 외교는 화해를 직접 실천했다는 점에서 한일 관계의 전환점으로 남게 됐답니다.
냉탕과 온탕 오가는 한일 관계
화해 바람이 불던 한일 관계는 2000년대 이후 다시 차가운 공기를 맞게 됐습니다. 역사 문제와 정치적 입장 차이로 양국 관계는 따뜻했다가 금세 얼어붙기를 반복했지요.
그 중심에는 일본의 아베 신조(재임 2006~2007, 2012~2020) 총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전후 일본에서 가장 오랫동안 총리를 지낸 인물인데요. 외교·안보 분야에선 강경 노선을 고수했습니다.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표현을 축소하거나 모호하게 다뤘죠.
2015년 아베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발표했습니다. 일본 정부 차원에서 과거에 대한 사과 메시지를 발표했고, 10억엔(현재 약 93억원)을 출연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화해치유재단을 만들기로 약속했지요. 하지만 피해자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채 이루어져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아베 신조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들이 모셔져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여러 차례 참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장기간 집권하며 한일 안보 협력을 강화했지만, 역사 인식 문제로 양국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한계를 남겼어요.
최근엔 아베 전 총리와 비슷한 정치 성향을 보인다고 평가받는 다카이치 사나에가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일본 총리가 한국과 일본의 대화를 어떻게 이어갈지 주목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