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첨성대, 지진에도 끄떡 없었죠

입력 : 2025.10.30 03:30

첨성대

2016년 9월 경주에 지진이 발생한 뒤 경주 첨성대의 피해 여부를 조사하고 있는 모습. 첨성대는 건물 가운데 창문으로 출입하는 독특한 구조예요. /조선일보DB
2016년 9월 경주에 지진이 발생한 뒤 경주 첨성대의 피해 여부를 조사하고 있는 모습. 첨성대는 건물 가운데 창문으로 출입하는 독특한 구조예요. /조선일보DB
31일 경북 경주에서 개막하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 맞춰, 야간에 경주의 대표적 국가유산인 국보 첨성대 외벽을 배경으로 '별의 시간' '황금의 나라' 영상을 띄운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첨성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천문대'로 알려진 우리나라 문화유산입니다. 신라 시대였던 서기 633년(선덕여왕 2년)에 만들어졌어요. 무려 14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지 않나요?


돌 364개로 27단을 쌓은 건물

첨성대를 선덕여왕 때 만들었다는 기록은 '삼국유사'에 보입니다. '시왕대연석축첨성대(是王代鍊石築瞻星臺)', '이 왕(선덕여왕) 때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거예요. 15세기의 기록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633년이라는 건립 연도가 기록돼 있습니다. 첨성대란 명칭은 '별을 관찰하는 건축물'이란 뜻이니 이름에서부터 그 용도가 명백한 셈이죠. 경주의 다른 유산과는 달리 건립 당시의 일화가 전해지지 않은 게 아쉽습니다.

첨성대의 구조를 보면, 높이는 약 9.17m입니다.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예요. 맨 아래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가 있고 그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맨 위에 우물 정(井) 자 모양의 '정상부'를 얹었죠. 원통부에는 부채꼴 모양의 화강암 돌 364개로 모두 27단을 쌓아 올렸습니다. 중간에 남쪽 방향으로 정사각형 문이 나 있습니다.

위는 사각형, 아래는 원 모양이어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천원지방·天圓地方)라는 고대의 우주관과는 반대예요. 그 이유에 대해선 '천체와 계절의 변화를 더욱 정확하게 관측하기 위한 구조'라는 얘기가 있고, '불경에 등장하는 수미산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란 추측도 나옵니다.

많은 사람은 '돌 364개로 27단을 쌓았다'는 숫자도 뭔가 의미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364개에 임금(선덕여왕)의 존재인 1을 더하면 1년 365일이 되는 것이고, 맨 아래 장대석을 포함하면 28단이 되므로 28수의 별자리를 상징한다는 분석도 나와요. 또 선덕여왕이 신라의 27대 임금이란 사실이나, 달의 공전 주기가 27일이란 사실을 상징했을 수 있습니다. 또 364²+27²=365²이 된다는 계산도 있어요.


왜 사다리를 타고 가운데로 들어가게 했을까

그런데 말이죠. 첨성대를 보면 생겨나는 가장 큰 궁금증은 역시 이것 아닐까요. "도대체 어디로 들어가서 어떻게 별을 관측했다는 거야?"

'세종실록 지리지'는 다행히도 이 질문에 대한 답 일부를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 가운데를 통해 올라갈 수 있게 했다'는 거죠. 사다리를 놓고 가운데까지 올라간 뒤 창문 같은 구멍으로 들어가 안에서도 역시 사다리를 타고 꼭대기로 올라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의문이 남습니다. "그냥 맨 아래에 문을 냈으면 출입하기에 훨씬 편리했을 텐데, 도대체 왜?"

놀랍게도 그 이유는 아직 아무도 잘 모릅니다. 이 문은 춘분과 추분 때는 햇빛이 첨성대 밑바닥 전체를 환히 비추고, 하지와 동지 때는 햇빛이 전혀 비치지 않게 만들었다는 분석이 있어요. '석가모니가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불교 설화를 인용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중간 창문을 만들었더라도 아래쪽에 출입문을 별도로 만들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아리송합니다.

첨성대 상부에 당시 지어져 있던 누각에서 진짜 천문 관측이 이뤄졌을 것이란 설도 나오는데, 세월이 흐른 뒤 목조 건축물은 사라지고 돌만 남는 경우가 많아 그럴듯한 추측이라고 할 수 있죠.


"첨성대 건립 뒤 실제 관측 기록 많아졌다"

이렇게 뭔가 불편해 보이는 구조 등으로 인해, 첨성대는 천문 관측 기구가 아니라 종교적 상징물이거나 기념비, 제단, 왕권을 신성시하기 위한 도구였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과거 그 옆에 있었던 진짜 천문대는 사라지고 석조 부속 건물만 남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죠. 그러나 모두 확실한 증거를 찾기는 어렵고, 현재 학계의 정설은 '천문 관측 기구가 맞다'는 겁니다.

한국천문연구원 본부장을 지낸 김봉규 박사는 고대 한국의 천문학 자료를 종합 분석한 결과, 첨성대가 건립된 뒤 신라 천문 관측 기록의 양이 크게 증가했을 뿐 아니라 내용도 자세해졌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또 당시 관측된 유성이 떨어진 지점이 모두 첨성대 주변이었다고 합니다. 첨성대가 실제 기능을 했던 천문 관측소였다는 거죠.

첨성대가 있는 장소는 신라 때 주변에 관청 건물이 많았고 왕궁인 반월성과도 멀지 않은 장소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천문을 관측하고 앞날의 길흉을 예측하는 것은 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니 천문대가 도심에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겠죠.


평양의 '고구려 첨성대'는 진짜일까

첨성대가 지금까지 보존된 건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779년(혜공왕 15년) 규모 7.0 정도로 추정되는 '서라벌 대지진'이 일어나 경주에서만 1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났었어요. 그런데도 첨성대는 멀쩡했던 거죠. 건축 전에 미리 1.5m 이상 땅을 파 모래와 자갈을 채워 넣었고, 곡선이면서도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로 만들어 지진의 충격을 덜 받게끔 일종의 '내진 설계'를 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2016년 경주 지진이 났을 때는 맨 위 우물 정자 모양의 돌이 4㎝ 정도 움직인 데 그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중에서 유독 신라에만 천문 관측소가 있었던 걸까요? 조선 초에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이 옛 고구려 천문도를 바탕으로 했다는 얘기가 있듯, 고구려의 천문학도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에서는 2011년 "평양에서 신라보다 200년 빠른 고구려 첨성대 유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는데, 북한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적을 조작하는 경우가 있어 아직 진짜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