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이곳은 평양입니다"… 납치범 속이기 위한 작전이었죠
입력 : 2025.10.23 03:30
1969~1971년 세 번의 비행기 납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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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년 12월 12일, YS-11기 납치 사건 발생 다음 날 납북된 승객 가족들의 사연을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예요. 일부 승객은 북한에 억류돼 아직까지도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DB
이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비행기를 납치하는 이른바 '하이재킹' 사건이 많이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1968년부터 5년 동안 325건이 일어났다는 통계도 있어요. 아직 항공 보안의 수준이 지금처럼 높지 않아 총기나 폭탄을 지니고 비행기를 탄 뒤 승객을 인질로 삼았던 범죄가 많이 일어났던 거죠. 1969~1971년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세 건의 비행기 납치 사건은 모두 북한으로 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969년 '대한항공 YS-11기 납치 사건'
1969년 12월 11일, 강릉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YS-11 비행기가 대관령 상공에서 갑자기 방향을 북쪽으로 돌렸습니다. 이 비행기는 휴전선을 넘어 함경남도 정평의 선덕 비행장에 착륙했습니다.
알고 보니 승객 중 한 명인 조창희란 사람이 북한에 포섭당한 공작원이었고, 비행기를 탈 때 권총을 지니고 있었는데도 육군 준장 계급장을 단 군복을 입고 있어서 보안 검색을 피할 수 있었어요. 지금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죠. 그가 조종사를 위협해 기수를 북으로 돌렸던 겁니다.
비행기의 전체 탑승자는 51명이었습니다. 납북된 승객들은 온갖 세뇌 공작과 고문 등 고초를 겪었고, 납북 66일 만에 이들 중 39명이 판문점을 통해 송환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장·부기장과 승무원, 방송국 기자와 PD를 포함한 11명은 북한에 억류돼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970년 '요도호 납치 사건'
YS-11기 납북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70년 3월 31일, 일본 도쿄에서 후쿠오카로 가던 일본항공 351편(일명 요도호)이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납치범 9명은 일본 내 공산주의 조직 중에서도 폭력 혁명을 실천하려 했던 적군파(赤軍派) 소속이었습니다. 이들은 칼과 총·폭탄을 꺼내 승무원 7명과 승객 113명 등 모두 120명을 위협하고 인질로 삼았죠.
납치범들은 처음엔 기장에게 "(공산주의 국가인) 쿠바의 아바나로 가자"고 요구했으나 국내선 비행기에 쿠바까지 갈 연료가 있을 리 없었죠. 그러자 "북한의 평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북한에서 혁명에 필요한 군사훈련을 받고, 장기적으로 북한을 일본 혁명의 배후 기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정보 부족 때문에 일본 좌파 중에는 북한을 '이상적인 혁명 국가'로 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미리 작성한 성명서에서 "우리들은 '내일의 죠'다!"라고 선언했는데, '내일의 죠'는 1967년 처음 발표된 일본의 권투 만화로 일본 좌파의 성전(聖典)처럼 추앙됐습니다. 하지만 비행기 납치라는 큰 범죄를 저지르며 만화 주인공을 내세우는 이들의 모습은 뭔가 어설퍼 보였어요. 이들은 10~20대의 젊은 연령대였습니다.
기장은 연료 보충을 핑계 삼아 후쿠오카의 이타즈케 공항에 일단 내려야 한다고 납치범들을 설득했고, 이타즈케 공항에서 일본 자위대가 이들을 포위했으나 오히려 납치범을 더 자극시켰습니다. 다만 여성·노인·어린이 등 인질 23명은 풀려날 수 있었죠.
한반도 상공으로 날아온 요도호는 휴전선을 넘어 북한 영공으로 진입했으나, 다시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서울의 김포공항에 착륙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인 기장이 자발적으로 온 것"이라는 공식 입장을 밝혔으나, 사실은 김포 관제탑에서 통신을 가로채 김포공항이 평양공항인 것처럼 속였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한국 측에선 김포공항에 인공기를 걸고 한복 입은 환영단을 내세우는 등 평양인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그러나 납치범들이 창문 너머 먼 언덕에서 흑인인 미군을 발견했고 "김일성 사진을 가져와 보라" 같은 요구를 한 끝에 평양이 아니라 서울임을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납치범들을 상대로 다시 협상이 시작됐습니다. 끝내 야마무라 신지로 일본 운수성 차관이 대신 인질이 되는 조건으로 승객 전원이 풀려났습니다. 요도호가 평양에 도착한 뒤 야마무라 차관과 기장은 곧 송환돼 일본에서 '국민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정작 북한으로 간 납치범들은 혁명은커녕 평생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북한 측에서 확인한 결과 이들이 지녔던 총과 폭탄은 모두 장난감이었다고 합니다.
1971년 '대한항공 F27기 납치 사건'
YS-11기 납치 사건 이후 국내선 비행기엔 무장한 항공보안관이 탑승하는 규정이 생겼습니다(현재는 없음). 1971년 1월 23일 승객과 승무원 60명을 태우고 속초에서 김포공항으로 가던 대한항공 F27기가 또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범인 김상태는 월북을 기도한 한국인으로 기내에서 사제 폭탄 2개를 폭발시킨 뒤 북한으로 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비행기가 북으로 향하자 F-5 공군 전투기 두 대가 출격해 에워쌌고, 기장 이강흔은 이것이 마중 나온 북한 전투기라고 속였습니다.
김상태가 전투기를 보기 위해 창문으로 고개를 돌린 그 순간, 기회를 노리고 있던 항공보안관 최천일이 권총을 뽑아 그를 사살했습니다. 그러나 납치범의 손에서 떨어진 폭탄이 바닥에 뒹굴었고, 이때 수습 조종사 전명세가 자기 몸을 폭탄 위로 던져 폭발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두 차례 폭탄 폭발로 심한 손상을 입은 비행기는 추락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곧 휴전선을 넘을 상황이었어요. 고성군 초도리 앞바다 좁은 백사장에 동체 착륙을 했는데, 오징어 건조대와 충돌하는 바람에 간신히 바다에 빠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휴전선에서 불과 10㎞ 떨어진 지점이었습니다.
범인 김상태, 폭탄을 덮친 뒤 이송 도중 유명을 달리한 전명세를 제외하고 승객·승무원 58명은 모두 생존했습니다. 항공 보안관 최천일의 사격술, 수습 조종사 전명세의 희생과 기장 이강흔의 조종술이 모두를 살린 것이었죠. 그야말로 '기적의 불시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