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처음 TV 중계된 전쟁의 참상… 반전운동 불씨 지폈죠
입력 : 2025.10.22 03:30
미국의 반전운동(베트남 전쟁)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쏴라."
전설적인 복서 무하마드 알리를 상징하는 이 말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지요. 최근 그의 베트남전 징집 문서가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이 문서는 1967년 알리에게 베트남전 참전을 명령하며 발행된 문서로, 그는 전쟁을 거부하며 이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서의 경매가는 약 300만달러(약 43억원)에 이를 것으로 알려졌어요.
알리가 징집을 거부한 것은 단순히 전쟁터에 가기 싫어서만은 아니었어요. 그는 "나는 베트콩과 싸울 이유가 없다"고 말하며 종교적 신념과 양심의 자유를 이유로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 스타 중 한 명이었던 그의 말은 곧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지요.
그는 선수 자격과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했고 생계조차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지만,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으며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지요. 무하마드 알리는 미국의 반전(反戰)운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요. 오늘은 베트남전쟁 시기 미국의 반전운동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설적인 복서 무하마드 알리를 상징하는 이 말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지요. 최근 그의 베트남전 징집 문서가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이 문서는 1967년 알리에게 베트남전 참전을 명령하며 발행된 문서로, 그는 전쟁을 거부하며 이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서의 경매가는 약 300만달러(약 43억원)에 이를 것으로 알려졌어요.
알리가 징집을 거부한 것은 단순히 전쟁터에 가기 싫어서만은 아니었어요. 그는 "나는 베트콩과 싸울 이유가 없다"고 말하며 종교적 신념과 양심의 자유를 이유로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 스타 중 한 명이었던 그의 말은 곧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지요.
그는 선수 자격과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했고 생계조차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지만,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으며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지요. 무하마드 알리는 미국의 반전(反戰)운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요. 오늘은 베트남전쟁 시기 미국의 반전운동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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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경매에 나온 무하마드 알리의 징집 서류. ‘캐시어스 클레이’는 그의 개명 전 이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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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징집을 거부한 무하마드 알리는 1967년 유죄를 선고받았어요. 재판정에서 나온 알리에게 취재진이 질문을 하고 있는 모습이에요.
미국의 반전운동을 이해하려면, 먼저 미국이 왜 베트남전쟁에 뛰어들게 되었는지부터 살펴봐야 해요.
베트남은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의 점령지가 되기도 했어요. 그러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호찌민의 공산 정권이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며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프랑스가 다시 돌아와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면서 전쟁이 벌어지게 되지요. 전쟁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지만,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였습니다. 북부의 호찌민 세력(공산 진영)과 남부의 친서방 세력이 대립하게 된 거예요. 강대국들은 전쟁이 다시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1954년 제네바 협정에서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나누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2년 안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치르기로 약속했지요.
그런데 남베트남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남쪽에서만 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세웠고, 결국 남북 내전이 벌어졌죠. 미국은 처음엔 전쟁에 직접 나서지 않고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했지만, 전황이 불리해지자 베트남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합니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이 그 계기가 됐지요. 당시 미국 해군 함정이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은 것을 계기로 참전한 것인데, 훗날 이는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꾸민 일이었다는 폭로가 나왔습니다.
미국이 전쟁에 뛰어든 이후 전투는 점점 격화되었습니다. 베트남전 때 미국이 베트남에 투하한 폭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전선에 떨어진 폭탄보다 많았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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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년 샌디에이고 대학 학생들이 “모든 군인들을 지금 당장 귀환시켜라!”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어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처음엔 많은 미국 사람이 전쟁에 큰 관심이 없었어요. 하지만 TV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상황이 달라졌어요. 베트남전의 참상이 뉴스를 통해 거의 매일 미국 국민에게 전달된 거예요.
전쟁이 TV를 통해 생생하게 보도된 것은 베트남전이 처음이었어요. 시청자들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단적인 예로, 1965년 8월 미국 CBS방송은 미군 해병대가 베트남의 작은 마을 민가에 불을 지르는 장면을 생생하게 보도했어요. 미국 국민은 과연 미국이 평화를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맞는지 회의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반전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죠.
반전운동은 처음에 대학생들, 그중에서도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했던 백인 대학생들이 중심이었어요. 이들은 흑인 차별에 맞섰던 경험을 통해 사회의 불평등을 깨달았고, 베트남전 역시 "잘못된 미국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했어요. 학생 단체 주도로 1965년 4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반전 시위에는 약 2만5000명이 모여들었는데, 이 시위를 계기로 반전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반전운동은 흑인 민권운동과도 연결됐어요. 당시 전쟁에 나선 병사의 대부분은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고, 흑인 청년들도 적지 않았어요. 1967년 4월 4일, 마틴 루서 킹 목사는 뉴욕 연설에서 "흑인들이 전쟁터에서 너무 많이 죽어가고 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폭력 납품 업자가 되었다"라며 전쟁 중단과 평화를 요구했죠.
무하마드 알리의 징집 거부도 1967년에 일어났습니다. 알리는 전국 대학을 돌며 반전과 평화를 주제로 강연하기도 했어요. 그의 행동은 미국의 많은 청년에게 영향을 주었답니다. 반전을 외치는 젊은이들은 징집 카드를 불태웠고,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를 불태우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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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년 10월 21일 워싱턴 DC에선 수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반전 시위가 열렸어요. 한 시위자가 군인에게 꽃을 건네는 모습을 포착한 사진이에요. /크리스티·위키피디아·미 국립문서보관소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음악을 통해서도 널리 퍼졌어요. 밥 딜런, 존 레넌 같은 당대 최고 스타들이 전쟁을 반대하는 노래를 부르며 평화를 외쳤어요. 지미 헨드릭스는 1969년 '우드스톡 록 페스티벌'에서 미국 국가를 연주했는데, 찢어질 듯한 악기 소리로 전쟁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죠.
이 시기 청년들은 기존 사회의 틀과 규범에 반대하며 새로운 '히피' 문화를 만들기도 했답니다. 그들은 긴 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함께 모여 살며 평화·사랑·자유를 외쳤지요.
반전 운동은 닉슨 행정부(1969~1974) 시기 절정에 달했어요. 1969년 10월 15일 미국 전역에서는 '베트남전쟁 반대의 날' 시위가 벌어졌는데, 워싱턴 DC에서만 수십 만 명이 모였다고 해요. 미국 전역에서 수백 개의 대학이 동맹휴학에 나서기도 했지요. 이렇게 국내 여론이 나빠지자 미국 정부도 민심을 거스를 수는 없었어요. 미국은 곧 베트남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고, 1973년 파리 평화 협정을 체결하며 전쟁에서 물러났습니다. 반전운동은 전쟁을 멈추게 한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