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몽골 피해 수도 섬으로 옮겨… 팔만대장경도 이때 만들어
입력 : 2025.10.16 03:30
고려의 '강화도 시대'(1232~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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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가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긴 뒤 38년간 사용하던 궁궐이 있던 터의 전경. 규모는 작았으나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해요. 지금은 고려 건물은 없고 조선 시대 건물 일부만이 남아 있습니다. /강화군청
사실 고려는 1231년부터 30년 가까이 이어진 몽골의 침략으로 1232년(고종 19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었답니다. 1270년(원종 11년)이 돼서야 원래 수도였던 개경으로 돌아왔죠. 그러니 강화도는 38년 동안 고려의 수도였던 겁니다.
'몽골군 방어'와 '최씨 정권 유지'의 두 목적
고려는 918년 건국 이후 줄곧 문신 귀족(문벌 귀족)이 권력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1170년(의종 24년) 무신의 난이 일어나 홀대받던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집권자는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으로 계속 바뀌었고 1196년(명종 26년) 최충헌이 집권해 최씨 일가가 권력을 세습하는 '최씨 정권'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집권 중이던 1231년에 고려는 몽골의 침략으로 최악의 국난에 직면했습니다. 이 침략은 무려 28년 동안 9차례에 걸쳐 계속됩니다.
전쟁 발발 이듬해인 1232년, 최우는 '몽골에 대항하기 위한 강화도 천도(遷都·수도를 옮김)'를 결정했습니다. 몽골의 1차 침략 이후 과도한 공물과 인질 요구에 시달렸고, 재침입이 우려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강화도는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라 기마병이 중심인 몽골군으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하다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회 전반에 무신 정권의 폭정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권력 유지를 위해선 새로운 곳으로 천도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최우는 개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장군 김세충을 죽이고 천도를 강행했습니다. 이후 전쟁이 끝난 1259년까지 과연 몽골군은 바다를 건너 고려의 수도 강화도로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강화도를 제외한 내륙 지역은 방어선이 약해져 몽골군의 약탈과 파괴에 시달렸죠.
62년 만에 무너진 최씨 무신 정권
고려의 새 도읍 강화도에는 천도 2년 만인 1234년(참 외우기 쉬운 연도입니다) 궁궐과 여러 관청이 세워져 자못 수도다운 시설이 갖춰졌다고 합니다. 군사적 방비 시설로는 내성·중성·외성과 해안의 제방을 만들었죠. 모두 여러 지방에서 징발된 백성들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전쟁과 노역에 시달리는 동안 권력자 최씨 일가는 강화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습니다. 최우는 집을 지을 때 개경에서 좋은 목재를 실어 나르게 했고, 얼음 창고를 따로 만들어 여름철에 먹을 물고기를 저장했다고 합니다. 다른 왕족과 귀족도 피란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호화 저택을 짓고 팔관회·연등회 등을 즐기며 살았다고 해요.
천도한 지 17년이 지난 1249년(고종 36년) 최우가 죽고 아들 최항이 권력을 물려받았습니다. 강화도에 갇혀 최씨 정권의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됐던 임금 고종은 1254년 은밀히 몽골 측과 접촉해 '강화도에서 나오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1257년 최항이 죽고 최씨 정권의 4대 권력자 최의가 집권했으나 다른 무신들과 갈등을 빚었고, 이듬해인 1258년 무오정변이 일어나 피살됐죠. 최씨 정권은 62년 만에 끝나고 김준이라는 무신이 새 집권자가 됐습니다.
종전 뒤에도 11년 더 이어진 '강화도 시대'
이제 고려의 고종은 긴 전쟁을 마치고 개경으로 환도(還都·옛 수도로 다시 돌아감)하기 위해 몽골과 강화(講和·싸움을 그치고 평화로운 상태가 됨) 협정을 시도했습니다. 1259년 고려 태자가 강화를 위해 몽골로 갔는데, 마침 몽골 제국의 4대 임금인 몽케 칸이 갑자기 죽어 형제 사이인 쿠빌라이(훗날 원 세조)와 아리크부카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태자는 쿠빌라이 쪽을 선택했고 다행히 그가 승자가 됐습니다. 이는 이후 고려가 몽골의 간섭을 받으면서도 나라의 명맥과 고유한 풍속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이로써 종결됐고, 어쨌든 고려는 상처투성이로나마 살아남았습니다.
태자가 몽골에 간 새 고종이 승하했고, 돌아온 태자는 1260년 24대 임금인 원종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럼 이제 개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무신 집권자 김준은 계속 환도를 반대했습니다. 강화도를 떠나 제주도로 천도할 계획까지 세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268년 일어난 무진정변으로 김준은 피살됐고, 임연과 임유무가 잇달아 무신 정권을 유지했습니다.
마침내 원종의 명에 따라 1270년 5월 임유무가 체포돼 죽었고, 이로써 무신 정권이 막을 내리는 동시에 고려의 '강화도 시대'도 끝나게 됐습니다. 몽골과 전쟁이 끝난 지 11년 만에 고려는 개경으로 환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신 세력의 일원이었던 삼별초는 강화도를 탈출해 이후 3년 동안 진도와 제주도에서 고려 조정에 반기를 들고 몽골에 대한 항쟁을 지속했습니다.
팔만대장경의 탄생과 황룡사탑의 최후
이렇게 보면 고려의 '강화도 시대' 38년은 전쟁과 정변으로 점철된 것 같지만, 대단히 중요한 문화유산이 탄생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바로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5년 동안 제작된 팔만대장경입니다. 고려 현종 때 새겼던 초조대장경이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자 다시 제작해 현재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불경의 대도서관'이자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죠. 지금은 경남 합천 해인사에 보관돼 있습니다. 다만 팔만대장경을 새긴 곳은 그동안 강화도로 알려졌지만, 경남 남해군에서 만들었다는 유력한 증거가 2013년에 나왔고 현재 국가유산청 홈페이지에도 '남해에서 새겼다'고 소개돼 있습니다.
반면 이 시기에 안타깝게 사라진 문화유산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의 20여 층 빌딩 높이와 맞먹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문화유산인 황룡사 9층 목탑입니다. 서기 645년 선덕여왕 시절 완공된 이 목탑은 1238년 몽골군이 황룡사 전체에 불을 질렀을 때 함께 불타 버렸습니다.